[오키카구]
오키카구 전력 <환상>
안개가 자욱한 숲속이었다. 오키타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빠르게 발을 놀리고 있었다. 손에 든 묵직한 비닐봉지를 내동댕이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콘도 이사오가 감기에 걸렸다.
안개 속에서 본 너는 환상일까.
사실 오키타는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두시간 전 야마자키와 히지카타가 출발했고, 자신은 맡은 임무의 마무리 때문에 출발이 늦은 것이었다. 히지카타의 성격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챙겼을 것이다. 빈손으로 떨렁떨렁 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무려 콘도 이사오의 병문안이다. 대해엽을 넘어서라도 그가 무사한지 확인을 해야 적성이 풀리기 때문에 3일 철야에도 오키타는 빠른 걸음으로 콘도에게 가고 있었다.
콘도가 머무는 곳은 오에도 병원이 아니었다. 마침 지나가던 시무라 남매의 추천으로 숲속 깊은 좋은 여관에서 요양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콘도의 상태를 지레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병명은 급성비인두염, 감기다. 콘도가 해결사네를 초대했을때도 긴토키는 그깟 감기가 뭐라고, 모아놓은 돈이 꽤나 있는 국장님은 급이 다르네~ 라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했었다. 콘도가 여관을 고집한 이유는 단 하나. 오타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웃긴 이유였다. 모두가 어쩔수 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오키타는 웃을 수 없었다.
살짝 쌀쌀한 날씨에 오키타는 위에 걸칠 옷을 챙기지 못한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히지카타보다 뒤쳐진다는 것에 열을 받아 곧바로 그런 생각은 잊어버렸다. 도착하면 히지카타에게 감기약부터 던지고 콘도상이 무사한지를 보고,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토끼 한마리. 급하게 정지하느라 중심을 잃은 오키타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평소 그에게 원한이 많았던 사람이었다면 배꼽을 잡고 실컷 비웃을 정도로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지, 오키타는 당장 생각나는 사람만해도 손가락 발가락이 모자를 정도이니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채 그 자세 그대로 잠시 굳어있었다. 오키타 앞의 토끼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다. 어릴 적 갓 내린 눈을 뭉쳐서 만든 눈토끼가 살아 움직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토끼는 새빨간 눈을 꿈뻑거리고 귀를 몇번 쫑끗 거리더니 호다닥 달아났다. 토끼는 갔지만 오키타는 일어나지 못했다. 하얀 토끼라니. 하필 수많은 숲속마을 동물들 중 그거라니. 한사람, 섬광처럼 스쳐가는 인물이 있었다.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임무를 3일 철야해서 겨우 끝내게 만든 장본인이 떠오르는 동물이었다. 동물은 죄가 없지. 오키타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다시 서둘렀다. 더 복잡한 마음이 들기 위해 평소처럼 눈을 돌리고 달아났다.
숨이 차오를 정도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만 신파치가 알려준 표지판은 나오지 않았다. 기온은 낮았지만 몸에서 나는 열기로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면서 오키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숲속을 들어왔을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풍경이었다. 앙상하게 가지만이 남은 나무들이 양 옆으로 빼곡히 들어와 스산한 분위기를 한층 심화시키고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에 어울리지 않은 입김이 나면서 갑자기 도는 한기에 오키타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눈이 시릴정도로 부는 바람에 결국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면서, 오키타는 발밑이 따뜻해지는 기운을 느꼈다. 보들거리고 따뜻한 무엇인가 자신의 발 밑에 있다는 것을 알자 아까전 보았던 하얀 토끼가 당연스럽게 떠올랐다. 딱 소동물처럼 체온이 높은 그 사람의 생각이 다시 피어올랐지만 아까와 다르게 생각을 떨쳐내지 않았다. 몸이 추워서 그런가, 온기를 느낄 수 있는것이 그 사람을 연상시키는 것이어서 그런가, 오키타는 알지 못했지만 딱히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람이 멎고, 눈을 뜨고 발밑을 내려다보지만 기대했던 토끼는 아니었다. 어디선가 날라온 털뭉치가 자신의 발에 막혀 붙어있었을 뿐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발을 흔들어 털뭉치를 떼어낸 오키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무게가 있는 걸음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뻗어있는 산책로를 따라 한없이 걷기만 했다. 걷는 길목에 뜬금없이 심어져 있는 장미를 발견했다. 하얀 장미었다. 또다시 하얀색, 한숨을 푹 쉬는 오키타의 눈길에 들어온 빨간색 페인트. 옆에 적혀있는 쪽지에는 정갈한 글씨로, '마음이 어지럽다면 장미를 찰하면서 마음을 정리해 보아요'라고 적혀 있었다. 환경파괴 아닌가, 이거.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면서 오키타는 벌써 두번째 장미를 칠하고 있었다. 언제나 빨간 치파오를 입고 다니는 그 사람이 떠올랐지만 아니다. 장미보다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난 후가 가장 아름다운 수국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꽃집 앞에서 평소의 커다랗고 무거운 보라색 우산을 가뿐히 든 채로 쪼그리고 앉아서 수국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려, 결국 다음날 수국을 한다발 가득 샀었다.
색색별로 화려한 수국보다 정갈한 자주색과 하늘색으로 어우려진 파스텔톤의 수국은 순찰때도 방해였고 얼굴을 붉힌 채 누구의 선물이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는 카미야마도 방해였다. 카미야마는 발로 차 주었지만 순찰은 찰 수 없어 그대로 들고 순찰을 돌았다. 그리고 운 나쁘게 마주쳐버렸다. 놀란듯이 눈이 땡그래졌다가 의아하다는 얼굴에서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불길한 표정으로 이어지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우하하하하!! 재밌어 죽겠다는 높낮이로 잔뜩 웃었다. 그때의 표정이 어땟더라.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웃더니 고인 눈물을 훔쳐내면서 차이고 나서 울지나 말라, 해. 라는 말과 스쳐갔다.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둔소로 돌아와 화병에 꽃고 물을 주었다. 떨어지지 못하고 꽃잎 위에 올라탄 물방울이 너무 반짝거려서, 치우지 못하고 지금까지 책상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칠할 장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혀 정리되지 않은 마음에 화풀이라도 하듯 쪽지를 벅벅 찢고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또다시 한참을 걷다 표지판을 보았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표지판은 왼쪽을, 마구 흘려진 글씨로 읽지 못하는 표지판은 오른쪽을, 그리고 아무 표지판도 세워져 있지 않은 앞쪽 길이 오키타의 앞에서 선택을 강요했다. 분명 신파치는 서둘러 준비하면서 표지판이 나오면 다 온것이라고 말했다. 정작 중요한 세 갈림길이라는 것과 어느 길이라는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길을 고를지 정했지만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긴토키가 어디선가 빌려온 트럭을 타고 그 사람까지 가장 먼저 출발한 것을 현장에 남아있던 오키타가 봤었다. 창문으로 내밀어진 가운데 손가락이 점점 멀어지는것을 하던 일을 멈추고 봤었다.
"아저씨, 안가냐, 해?"
"누가 아저씨인거냐 제대로…"
다홍빛 머리, 당고 머리, 보라색 우산. 영락없는 차이나 였다. 토끼를 처음 봤을때보다도, 바람에 가만히 서 있었을때보다도, 장미를 칠하면서도 막히지 않은 말문이 막혔다. 앳되고 작은 체구의 카구라는 화려한 장식이 아닌 밋밋한 천으로 당고 머리를 하고 있었고 치파오가 아닌 노란 우비를 입은 채 오키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이나."
"그게 누구냐, 해? 나는 카구라다, 해."
"카… 그래 카구라겠지."
들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질색해 한번도 압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는 이름을 자신을 기억도 못하는 어린 카구라에게 말하고 있었다. 바싹 마르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내려다 보았다. 뭐가 또 마음에 안드는지, 카구라는 오키타의 종아리에 킥을 날렸다. 기습 공격에 방어도, 피하지도 못해 정통으로 맞은 오키타는 절대로 내뱉지 못할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야토라더니, 우주 최강 민족이라더니, 잊은 설정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제대로 들어간 카구라의 주먹은 작고 오리지널보다 훨씬 약했지만 지구인 오키타를 잠시 당황하게 만드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종아리를 감싸면서 주저앉은 오키타에 비슷해진 눈높이가 되자 만족하다는 미소가 얼굴에 가득 퍼졌다. 어려져도 성격은 그대로라는 거지, 이거?
"건방진 꼬맹이."
"흥, 몸집만 크다고 나대지 마라, 해. 마미가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
"내가 솔직하지 않아?"
"건방진건 너다, 해!"
"뭐?"
오키타는 기가 차 욱신거림을 망각한 채 벌떡 일어나 카구라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나아갔다. 당황했는지 몸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간 카구라의 눈에는 금새 눈물이 가득 찼다. 울리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여서, 되려 당황해 오키타는 카구라에게 손을 뻗었다. 자신보다 크고 모르는 어른이, 검은색 후드를 입고 손을 위에서부터 뻗어오자 결국 왁 울음을 터트린 카구라는 그대로 오키타 사이로 쏙 빠져나가 왼쪽 길로 달려갔다. 마미이!!!! 카무이이이!!!!!!!
어정쩡하게 뻗은 손을 머쓱하게 내린 오키타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렇게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단 한번도 흘리지 않은 눈물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보는것은 사양이었다. 진하게 내려진 안개속으로 들어가버린 카구라의 목소리도, 작게 울리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에 들린 비닐봉지의 바즈락거리는 느낌에 문득 정신을 든 소고는 선택한 길을 가려고 했었다. 발치에 흘려진 우산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언제나 들고 다니던 우산을 내팽기고 갈 정도로 무서웠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지만 이런 감정은 벌써 지난간 감정이었다. 안갯속에 먹힌 것 처럼 아무 흔적이 느껴지지 않은 어둠속으로 제 발로 걸어가 우산을 건내주면서 다정하게 사과를 건낼 인물도 아니었다. 평소 카구라가 하던 듯이, 접힌 우산을 어깨에 걸친 채 툭툭 어깨를 때려봤다. 묵직한 무게감에 이 우산을 들고도 잘도 지냈다는 생각에 새삼 대단해졌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한 느낌에 바로 내렸다.
"그거, 너꺼야?"
"아니."
"…"
"…"
"...차이나냐."
"그 단어, 오랜만에 듣네."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뒤를 돌아볼 수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또다른 카구라다. 멍청한 ~해 말투를 쓰지 않고 살짝 낮아지고 성숙한 목소리는 분명 미래의 카구라일 것이다. 예전의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오키타 또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한숨을 푹 쉬는 소리가 들렀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 걸까. 오키타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구라는 평소 한숨을 쉬지 않았다. 한숨을 쉴 정도로 불행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시끌벌쩍한 가족들과 긍정적인 성격, 그리고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다시마 초절임과 음식들. 평생 한숨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깊게, 무겁게 한숨을 쉰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돌아봐서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치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너, 언제부터 그런 한숨도 쉴 수 있었냐."
"무슨,"
"멍청하고 단순하고 가벼운 너가 변할정도로 미래가 어두운 거냐고!"
"흥분하긴… 걱정마. 심각한 건 아니야. 이제 곧 다 해결될 거야. 해결사 구라씨가 있으니까…"
"그럼 보여줘."
"뭐를?"
"얼굴. 너는 다 드러나니까 알 수 있어. 얼굴을 본다면 알 수 있다고."
"하하… 너야말로 많이 변했네. 너 이런 성격이었구나?"
"차이나…"
"됐어. 그 우산, 소중히 간직해 줘."
발소리가 멀어진다. 앞에는 아무도 없는데, 발소리는 뒤에서부터 오키타를 스쳐 멀리 멀리 나아간다. 이상한 기분이 몸을 휘감는 기분에 오키타는 주먹을 꽉 쥔다. 언젠가부터 신경쓰이는 사람, 임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 답이 없는 사람. 그리고-
"사디?"
이 숲은 이상하다. 콘도의 요양을 위해 꼭 지나쳐야하는 음산한 숲. 아직 잎이 떨어지기 전인데 앙상한 가지밖에 없는 나무들. 에도의 날씨는 하루종일 맑을 예정인데 자욱한 안개로 나아가야 할 길이 흐릿하다. 있어서는 안되는 하얀 토끼와 하얀 장미. 갑자기 불어온 바람과 너.
"켁, 뭐하는 거냐, 해!"
"진짜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해! 진짜냐 이거!! 놔라, 해!!!!"
더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어 그대로 달려가 카구라를 꽉 껴안는다. 이것이 안개가 만들어 낸것이든, 진짜든 상관이 없다. 애써 외면하고 달아나려는 감정이 자신을 자꾸만 불러내고 놓아주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에 굴복한 오키타는 남은 마지막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딱 품에 들어가고 적당한 체온에 한없이 가볍고 단순한 카구라. 안개는 걷히고 맑은 햇살이 오키타의 등 위로 따스하게 내리쬔다.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의 햇살이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껴안은 이유가 뭐냐, 해."
"안고 싶었어."
"그랬냐, 해."
"응…"
"...그럼 이제 놔라, 해!"
"...너 울지도 말고 우산도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지 말고 어울리지도 않게 폼 잡고 한숨도 쉬지 마."
"그럼 놓아줄 거냐, 해?"
"아니."
"악! 정말! 걱정마라, 해! 너가 말 안해도 그럴 예정이다, 해!!"
"그리고…"
"또 뭐냐, 해!"
"...사라지지 마."
"…"
"…"
"차, 참나. 고작 20분 걸어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한 거냐, 해. 감기는 고릴라가 아니라 너가 걸린거 아니냐, 해?"
"얼굴보고 싶어."
"우구굽?"
양 볼을 잡고 눈을 마주친다. 또렷히 보이는 붕어입이 된 카구라가 오키타의 눈동자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카구라의 눈동자에도 가득 채워지는 오키타. 만족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볼을 놓아주자, 빨개진 볼을 황급히 문지르면서 째려본다. 하나도 무섭지 않지만, 장단에 맞춰준다고 어깨를 으쓱해준다.
"그보다 왜 안들어고 있었냐, 해?"
"뭐?"
"다 왔는데 꼼짝업이 서 있어서 토시가 보냈다, 해. 고개는 푹 숙여서 얼굴은 안보이지. 아, 고릴라가 위험한지도 봐 달라고 했다, 해."
"나, 방금 숲에서,"
"숲? 뭔 소리냐, 해? 큰 길 따라서 쭉 오면 바로 오는거고, 너가 온 길이 바로 그 길이다 해."
"헤매고, 있었,"
대체 뭐였던 것일까. 아직도 남아있는 한기에 돋은 소름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환상, 그렇다면 왜, 누가 만들어 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