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카구] 단 하루
오키타 소고는 카구라를 좋아하고 있다. 현재진형행이고, 그가 이 사랑을 그만둘 것이라고는 그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키타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키타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점, 단점, 강한 부분, 약한 부분, 좋아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태까지. 그는 물이 가득 찬 물병이었다. 물이 넘쳐 흐르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서류 작업을 자처한 이유였다. 펜을 휘갈기던 오키타는 그대로 책상으로 엎어졌다. 아침 회의 때 한동안은 순찰보다는 서류 작업을 하면 안되겠냐는 문의는 잠시 회의를 침묵으로 빠트리는데 충분했다. 잠시 뒤 정상으로 돌아온 분위기에 오키타의 의견은 통과되었지만, 회의 후 대원들의 수근거림은 어떻게 되지 못했다. 아무런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키타가 왜 그런 업무를 자처했는지를. 순찰조에서 임시 제외되어 빠진 공백에는 요즘 업무가 적어진 야마자키가 강제 배정당했다. 오키타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하나씩 빼가면서 마음을 정리하면서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조금만 방심해도 카구라의 생각으로 빠졌고 서류의 단순노동은 그런 생각의 일탈을 조금이나마 막아줬다.
사실 이 에도, 카부키쵸에서 카구라의 존재를 무시한 채 살아가기에는 조금 힘들었다. 이래저래 유명인사에다 툭하면 얽혀오는데 무시를 할 수 없었다. 카구라는 오키타가 어디를 가도 있었다. 성에서 쇼군가를 호위하려고 들어가면 소요와 놀다가 늦어져서 자고 간다고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 잠옷이 어깨를 축축하게 적시고는 두꺼운 겨울 이불을 한손으로 두개를 가뿐히 들고 있었다. 순찰을 돌러 거리를 걸어다니면 사다하루를 이끌고 거리를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당고 가게에서 땡땡이를 치고 있으면 숙취해소를 해야한다는 긴토키 뒤로 신파치와 협동 구박을 하면서 나타났다. 심지어 마트에서 타바스코를 사러 갔을때는 다시마 초절임을 사러 온 카구라를 마주쳤다. 오키타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카구라를 마주치고, 마주칠때마다 빠져들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서류 작업에 지쳐 일 능률이 점점 떨어지자, 콘도가 잠시 쉴 겸 심부름을 시켰다. 이것저것 담고 계산을 마치고 마트로 나서자 비가 쏟아졌다. 갑작스런 비는 마지막 기상 예고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기가 막히게 기상 정보를 전하던 케츠노 아나운서는 그날 개인적 사정으로 오후에 첫 방송을 했다. 마트 문앞에 서서 멍하니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옆의 가전제품 가게에서 해맑은 케츠노 아나운서의 비예고 소식이 들렸다.
"예고는 비가 오기전에 해야지, 비가 오고 나서 예고를 하는게 말이돼?"
투덜거리는 한 아저씨의 말에 동의한 오키타는 마트에서 우산을 사려는 생각으로 바로 몸을 돌렸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결코 가늘지 않았고 예상치 못한 비는 사람들에게서 한마디씩 투덜거림을 내뱉는데 충분했다. 그런 소음 속에서 오키타는 한 목소리를 캐치했고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고 다시 돌아간 몸은 카구라와 마주했다. 언제나의 보라색 우산을 든 카구라는 의외라는 듯이 오키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복이 아닌 간편한 평상복을 입고 마트 비닐봉지를 든 모습은 카구라에게 낯설었다. 낯선 것도 계속 보게되면 자연스러워진다. 금새 입이 양 옆으로 쭉 찢어지더니 즐겁다는 듯이 오키타를 놀리기 시작했다.
"푸풉! 뭐냐, 해. 설마 너, 우산이 없는거냐, 해?"
"모든 사람이 너처럼 365일 우산을 들고 다니는 건 아니거든?"
"푸푸풉, 비가 올 줄도 예상 못하고 준비 못하는 얼라에게 들어도 아무 소용 없다, 해~"
"누가 얼라, 됐다. 갈길이나 가라. 그리고 내가 너인줄 아냐? 우산쯤이야 사면 되는거지. 누구씨랑 다르게 돈이 차고 넘치거든."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 우루루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우산을 들고 있었다. 전부 똑같은 하얀색 비닐우산을 제각기 혼자이든 상대와 함께이든 펼치고는 마트를 떠났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알바가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종이 하나를 붙이고는 다시 들어갔다. 흘린 글씨체였지만 짜증나게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우산은 다 팔렸습니다.
"푸하하하! 돈이 차고 넘치면 돈을 쓰고 가라, 해. 역시 얼라는 얼라다, 해."
"우산 같이 쓰자."
"뭐? 싫다, 해! 얼라랑 같이 쓰면 바보가 옮아서 싫다, 해. 그냥 뛰어가라, 해! 이런 날씨-"
먹구름이 꾸물꾸물 모여져 더욱 어둠이 짙어지더니 발비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카구라의 말이 먹혔다. 자신도 이정도의 빗줄기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우산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구멍이라도 뚫린듯 억세게 쏟아붓는 비는 바로 앞에 있는 오키타의 말도 삼켜버렸다. 웅얼거림이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듯하지만 정확한 말이 들리지 않아 무시했지만 자꾸만 신경쓰이게 하고 툭툭 건들자 카구라는 올려다보던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오키타를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키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비를 맞으면서 카구라의 눈앞에 있었다. 일순간 시야에 가득 찬 오키타의 얼굴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만 오키타는 상관하지 않고 다시 성큼 눈앞으로 걸어와 말을 반복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두근거리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카구라에게 닿지 않게 해준 비에게 감사하며 여러번을 연습했던 말을 멋지게 말했다.
"우산, 안 씌워 줄꺼야?"
평소라면 꼴 좋다면서 그대로 달려갔을 터인데, 고개를 끄덕여버린 자신에게 더 놀라버렸다. 카구라는 자신이 왜 그런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비가 와서? 지구에 와서도 몇번이고 맞이한 비오는 날이었다. 상대가 우산이 없어서? 그렇다고 길가에서 비를 맞으면서 달려가는 저 사람에게 기꺼이 우산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젖었으니까? 이하동문. 평상시 안하던 말을 해서? 평상시가 뭐지? 그보다 나 왜 이런거 생각하지? 카구라의 생각은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했고 그런 카구라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오키타의 밀착이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몸이 자신의 맨살과 닿자 오소소 돋는 소름에 카구라는 멍하니 오키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젖어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는 물을 머금고 축 쳐졌다. 긴토키처럼 곱슬머리가 아니었기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물에 젖은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키타는 그런 카구라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해, 조용히 카구라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우산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카구라의 키에 맞춰 들어진 우산은 오키타의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게 만들었고 오키타는 슬슬 허리가 아파와졌다. 자신은 우산을 빌려쓰는 입장이니, 우산을 들겠다는 말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계산한 오키타는 카구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눈썹을 찡그린채 자신을 뜷어져라 쳐다보는 카구라에 오키타는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카구라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일은 많았다. 카구라는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하는 셩격이었고 내용이 어떻든 간에 오키타는 카구라와 많은 대화를 했었다. 부슈에서, 일부러 비오는 날 미츠바와 오키타는 마당에서 우산을 쓴 채 서있곤 했다. 우산모양이 마치 지붕같아서 아늑하지 않니, 소쨩? 부드럽게 웃던 미츠바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카구라의 푸른 눈동자는 이제 막 떨어지는 비를 투명한 그릇에 가득 담아 놓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일렁이는 눈동자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오키타는 흔들리는 자신의 물병에 그 존재를 깨달았다. 물이, 차 있었구나. 그것도 이만큼이나. 한방울 더 떨어지면 넘칠 정도의 물을 눈치채지 못했었어.
"어이, 사디. 너 괜찮냐, 해?"
"…."
"갑자기 멈추면 어떡하냐, 해. 우산을 쓰는건 비를 맞지 않기 위해서인데, 너가 멈추면 다시 비를 맞게 되잖, 정말 괜찮은거 맞냐, 해?"
"...괜찮아. 그보다 우산 이리 줘. 우산은 원래 키가 큰 사람이 드는 거거든? 설마 너 키가 크다는뭐 그런 생각을 한건 아니겠지?"
"재수없다, 해. 불편하면 그냥 가라, 뭐하는 거냐, 해! 우산 내놔라!"
"꼬맹이가 든 우산때문에 젊은 나이에 환갑 넘긴 영감들처럼 허리가 휘게 생겼어. 책임질 거 아니면 얌전히 넘겨라?"
"키가 큰 너가 잘못이다, 해! 너 키를 줄이면 된다, 해!!"
"이 정신나간 꼬맹이가! 너 발차기 맞았다가 경찰 인생 쫑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진짜 너가 책임질꺼냐?"
"누구 좋으라고 징그러운 사디를 책임지냐, 해! 됐다. 카부키쵸 여왕님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겠다, 해. 똑바로 들어라, 해!"
그거 망상증 아니야? 비웃는 오키타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보지만 바로 붙잡히고 바싹 붙여져 이제는 두 팔이 겹쳐졌다. 바로 빼내려 했지만 시야에 들어온 오키타의 파래진 입술과 지쳐보이는 안색에 그만두었다. 긴토키가 바로 이전에 그런 몰골을 하고 돌아와서는 꼬박 이틀을 앓았다. 우산을 빌려줬는데 아파버리면 카부키쵸 여왕님의 명성에 금이 가니까, 라는 생각으로 가만히 있지만 자꾸만 부딪히는 팔과 어깨의 손이 신경쓰였다. 왼쪽 어깨를 둥그렇게 감싸쥔 손은 뜨거웠다. 앓는 긴토키의 손과 발은 찼다. 카구라는 자꾸만 드는 생각을 애써 무시한 채 오키타의 발걸음에 맞췄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두 발이 거의 동시에 멈췄다. 오키타를 올려다 본 카구라는 신센구미 둔소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더욱 뜨거워지는 손바닥의 열기는 잠시동안 카구라의 어깨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인사는 없었다. 문이 열리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두어명 나타나더니 곧이어 초록색 우산을 든 남자가 오키타에게 씌워주는것을 끝으로 둔소의 문은 굳게 닫혔다. 우산위로 울려지는 빗방울의 진동은 강하지도 않았으나 자꾸만 카구라를 흔들었다. 손잡이의 열기를 양손으로 감싸쥔 채, 카구라는 나지막히 혼잣말을 뱉었다.
"저녀석,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해."
따끈한 밥에 먹음직스럽게 계란을 올리고 간장으로 충분히 양념을 하고 한숟갈 크게 퍼서 입안으로 넣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카구라는 압안 가득 퍼지는 따끈함에 노곤노곤해진 몸을 맡겼다. 밥을 싹싹 비우고 양치를 하고 소파에 널부러지니 긴토키가 앞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티비를 틀었다. 누운 채 티비를 보던 카구라에게 도장으로 퇴근하는 신파치가 한마디를 했지만 그게 다였다. 카구라는 여전히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고 누워서 거꾸로 뒤집힌 티비를 보고 있었다. 신파치의 한숨은 문을 열면서 빗방울 소리에게 바통을 터치했다. 여전히 내리는 비는 어느새 장대비에서 조금 굵은 는개로 변했다. 우산이 펼쳐지는 경쾌한 소리에 이어 리듬을 만들어내는 빗방울의 우산을 때리는 소리는 해결사로 돌아와 일상에 뺏긴 마음을 다시 그때의 상황으로 데려갔다. 유난히 조용했던 오키타, 부탁을 하던 오키타, 돌발 행동을 했던 오키타… 온통 오키타로 채워진 머리에 카구라는 얼굴을 구겨봤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풀어졌다. 구겨지는 얼굴은 기분 나쁨의 이유였지만 지금 오키타 생각을 하는 카구라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오키타는 서류 작업보다는 순찰을, 조사보다는 돌격대장으로 앞장서 적을 향해 달려갔다. 땡땡이 치는 오키타를 발견하는 건 아이스크림 하나더에 당첨되는 것 보다 쉬운 일이었다. 볕이 좋고 조용한 장소에 있는 벤치에서는 웃긴 빨간 안대를 하고 드러누어 자고있었다. 카구라는 종종 오키타를 발견했다. 두어번 그냥 보냈다가, 마카를 들고 얼굴에 낙서를 하면서 놀려주곤 했다. 일어나서 낙서가 되어있는걸 알아차렸을텐데, 오키타는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낙서 장난도 두어번을 하다 그쳤다. 깨어있는 오키타는 카구라가 한 낙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카구라는 사다하루를 산책시키려 나갔다. 오후의 산책을 못한 전날의 몫까지 놀겠다는 듯 잔뜩 훙분해서는 카구라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놀았다. 시간을 확인해 저녁시간까지 들어오라는 신파치의 말을 다시 한번 더 새기고는 벤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벤치에는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러 나온 어린아이들과 부모님들로 가득 차 있어, 카구라는 공원을 돌면서 벤치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 비어있는 벤치를 찾는것은 다시마 초절임이 달달해지는 것 만큼 어려웠다. 지쳐서 그냥 땅바닥에 앉아버릴까라고 고민하던 카구라의 눈에 익숙한 덤불이 보였다. 고양이보다 더 깐깐하게 볕이 잘 들고 조용하고 아늑한 장소에서 자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비는 그쳤음에도 자꾸만 생각나는 '나를 좋아하는' 오키타를 향해 카구라는 발걸음을 옮겼다. 크라바트와 셔츠 단추 두어개를 풀어헤치고 제복을 벗어 옆에 걸어논 채 안대를 하고 자는 오키타가 마법처럼,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카구라는 반짝이는 효과음을 부정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곁으로 가 벤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는 오키타의 얼굴을 바라봤다. 갈색 머리카락과 굳게 닫힌 입술. 얼굴을 살짝 기울인 채 엎드려 오키타의 얼굴을 바라보기 얼마나 되었을까, 카구라는 오키타가 미남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줄곧 외면했다. 호스트에서도 얼굴 하나로 저 글러먹은 성격은 배제된 채 선택받았으니까.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이냐?"
조용한 정적을 뚫고 내뱉어진 오키타의 말에 카구라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 너, 안자고 있었냐, 해… 발음이 새어가 조금 우습게 들렸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키타는 무표정으로 카구라를 내려다봤다. 정말 아무 표정없는 얼굴이라 카구라는 자신을 좋아하는 오키타가 맞는지 헷갈렸다. 내가 쌍둥이를 착각한건 아닌가? 마이를 챙겨들고 빼놨던 검을 다시 찬 오키타는 말없이 카구라를 지나쳤다. 분해, 분하다고. 카구라는 얼이 빠진 채 자꾸만 분하다는 생각만 되풀이했다. 올려다보는거 싫어. 키 좀 크다고 으스대는거냐고. 그 얼굴로 아무 표정없이 아무 말 없이 간것도 싫어. 나를 무시한것 같아. 나를, 좋아한거 아니었냐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마음이 분했다. 사다하루를 데리러 가는 길에도, 부드러운 털을 실컷 쓰다듬어주고 해결사로 돌아오는 길에도, 왜이렇게 일찍 왔냐고 놀라는 신파치에도 카구라는 자꾸만 아까의 상황을 되풀이했다. 오키타가 한 행동에서 이유를 찾으러 했고 이유를 찾으러는 자신의 행동에도 이유를 찾으러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지는 것 같은 느낌에 참았다. 이미 끝난 사건을 미련있게 품어두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눈두덩이를 한번 세게 눌러주고, 카구라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멈추었던 생각은 장마에 다시 이어졌다. 오타에가 늦은 점심을 사주겠다는 외식 약속에 부지런히 청소를 하는 신파치와 느긋하게 씻는 긴토키와 카구라는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이전까지 오키타를 전혀 보지 못했다. 공원 벤치에도, 당고 가게에도, 거리에도, 성에서도. 검은 제복들의 신센구미 대원들에게 시선을 자꾸 뺏기니 소요가 찾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었다.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그날 내내 추궁하는 소요에 많이 시달렸었다. 성 밖을 나가면서, 슬쩍 왜 그런 질문을 했었냐고 물어봤다.
'카구라쨩,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신센구미 분들을 바라봤다가 다시 돌려지는 얼굴에서는 실망감이 감춰지지 않았는걸. 그래서 그런가 했지.'
많이 티가 났나, 라는 생각에 오키타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너를 찾았다는 내 얼굴을 보면 너는 어떤 반응을 할까. 소요쨩처럼 질문할까? 아니면… 저번처럼 무시할까. 조금 슬퍼지는 마음에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넣었다. 그런 카구라를 보고 배가 고픈것이라고 착각을 한 신파치는 준비가 다 되어 가니까 먼저 가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게 아닌데, 바보 안경. 배가 고픈건 사실이라 카구라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우산을 들고 문을 열었다. 만화였다면 이 장면에서는 비가 오는 배경임에도 꽃이 활짝 피고 반짝이는 효과음이 한칸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미용실의 아저씨가 채워놓은 순정만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당시 카구라는 재미 없다고 던져 버렸지만 지금의 카구라는 내팽겨진 만화책을 주워 먼지를 털고 그 장면을 꼼꼼히 볼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오키타, 여자 주인공은 카구라. 한편의 만화라고 생각하니 카구라의 몸은 의식보다 더 먼져 움직였다. 우산을 던져버리고, 비 속으로 뛰어들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려니 그사이 사라질 오키타가 자동적으로 그려져 그대로 훌쩍 난간을 넘어 뛰어내렸다. 물이 출렁였다.
"멈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언젠가 티비에서 본 진기명기 쇼의 심사위원이 있었다면 백점 푯말을 들고도 일어서서 박수를 칠 만한 완벽한 착지였다. 크게 뜨여진 오키타의 얼굴에 만족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신발을 통해 느껴지는 물 웅덩이와 튀겨지는 물, 그리고 비스듬히 내려지는 비까지 모든게 예민하게 느껴졌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정신을 집중한 채 오키타에게 달려들었다. 들고있던 우산은 땅으로 떨어졌고, 뽀송하니 물 한방울 적셔지지 않은 오키타의 옷은 짧은 시간 내 푹 젖은 카구라의 옷과 비에 의해 축축해졌다. 카구라의 젖은 팔은 오키타의 목에 둘러졌고, 까치발을 든 카구라에도 불구하고 허리는 구부정하게 숙여졌다. 어정쩡하게 벌려진 오키타의 팔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잡았다, 해."
"너-"
"피한거라면 잘 피했다고 칭찬하겠다, 해. 열받게 하려고 했던거라면 성공했다, 해. 너 생각으로 무시하던 얼라가 된 걸 의도한거라면 대단하다, 해."
"무슨,"
"계속 생각났고, 계속 신경쓰였고, 계속 보고싶었다, 해."
"…"
"이게,"
"…."
"좋아하는 거다, 해. 내가, 널."
"아 진짜…"
먹잇감을 잡아먹는 조개가 그렇듯, 오키타는 벌린 팔을 접어 카구라를 꽉 끌어안았다. 하하! 만족스럽게 웃는 카구라의 숨소리가 귀에 모아졌다 흩어졌다. 작은 한방울이었다. 떨어지지 않기를 바랬던 한방울이었지만 어쩌면 떨어지기를 은근히 바래왔을지 모른다. 작은 물방울은 가볍게 떨어져 고여있던 물을 넘치게 했다. 작은 물방울은 카구라가 떨어트렸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물병 가득 차오르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운명이었다면 이미 차고도 넘쳐 다른 물병을 구해놨어야 했다.
"나도, 너가 좋아."
"역시, 너는 나를 좋아하는 건 틀림없었다."
너에게 빠지기에는 단 하루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