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히지] 고백편지
컴퓨터 화면이 밝아지면서 하단부의 알림창에 숫자 1이 떴다. 그와 동시에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면티와 회색 추리닝을 입은 채 음료를 들고 집으로 히지카타가 들어왔다. 히지카타는 대충 양말을 벗어 구석에 던지고는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단부의 알람을 확인하자 히지카타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도 그새 달궈진 방의 온도에 아슬아슬하던 얼음이 녹으면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팝업창을 띄우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히지카타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마요보로님, 좋은 오후에요!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리고 싶어서 부득이하게 디엠드려요.]
말도 이쁘게 하시지, 헤실 웃은 히지카타는 한쪽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그대로 들어내면서 열심히 답장을 쳤다.
[딸기우유님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무슨 일이에요?]
[그게... 제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어 고백을 하고 싶은데 제가 말주변이 없거든요.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마요보로님께 제 고백편지를 대행하고 싶어서요. 가능할까요?]
“딸기우유님 좋아하는 분이 계셨구나...”
팔로워 1010명을 자랑하는 마요보로는 한 장르의 유명한 글존잘이었다. 시원시원한 전개, 섬세한 감정 묘사와 생생한 표현으로 그 장르를 파지 않아도 한번쯤은 히지카타가 쓴 글은 읽고 가는 게 필수코스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의 몇 없는 트친 중 한명인 딸기우유는 초창기 트친이었다. 글을 올려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옛날, 딸기우유만이 그의 글을 보면서 감상과 피드백을 남기곤 했다. 여전히 마요보로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이 바로 딸기우유였다. 그렇게 딸기우유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히지카타의 애정인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가능하긴 한데, 저로 괜찮으세요? 도리어 딸기우유님의 고백을 망치는 건 아닐까요...?]
[그럴리가요! 제 인생최고 존잘님이신데, 마요보로님 말고 다른 누구에게 이런 부탁을 드려요!]
[ㅋㅋㅋㅋㅋ그럼 딸기우유님 도와드려도 되지요? 나중에 차이고 저 원망하기 없기에요?]
[헉 다당연하죠!! 정말 감사드려요ㅜㅜㅜㅜ]
감사인사와 더불어 함께 올라온 음료 기프티콘 한 장. 히지카타는 익숙한 로고에 책상 위 올려놓은 음료에 눈을 돌렸다. 잊혀진 아메리카노의 로고는 딸기우유가 보낸 기프티콘과 같은 음료였다. 언제나 트위터에 올리는 아메리카노 사진을 잊지 않고 제 취향에 맞춰 보낸 세심한 배려에 떨리는 가슴은 고개를 절로 젖히게 만들었다. 한껏 올라간 광대를 꾹꾹 누르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누가 보지도 않았지만 모니터 너머 딸기우유가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에 히지카타는 들뜨는 마음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기 전, 1시간 전 딸기우유로부터 받은 고백편지를 받을 상대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읽었다. 고양이상 얼굴에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얇은 입술을 가진 상대는 마요네즈를 매우 좋아하며 츤데레 기질이 많다는 등 상대를 묘사한 글이 구구절절 써져 있었다. 부끄러운지 돌려 말했지만 넘쳐나는 애정은 숨길 수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세심하게 관찰한 딸기우유의 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긴 글 속 상대를 칭찬하는 문장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바빠 약속을 잡아도 파토내기 일쑤인건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예의없는 사람 아니야? 그럴거면 애초에 약속을 잡지 말던가. 아니, 담배 피는 모습이 섹시하다니, 딸기우유님 비흡연자이시잖아!’
얼핏보면 단점으로 보이는 부분도 그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런 작은 움직임일 뿐이었다.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딸기우유의 애정을 듬뿍 받는게 틀림없는 상대의 단점을 어떻게든 찾아보며 헐뜯는 자신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되는 사람이잖아. 아끼는 트친이 호구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히지카타는 새벽 늦게까지 글을 읽으면서 딸기우유가 부탁한 고백편지의 초안을 작성했다.
“히지카타, 너 피곤해보여.”
“어? 어... 새벽까지 작업할 게 있어서.”
“우리 과제 없는데, 무리하지 마.”
“어...”
동기의 걱정에 대충 대답한 히지카타는 뻑뻑해진 눈을 비비면서 하품을 꾹 참았다. 딸기우유가 애정을 담아 보낸 짝사랑 상대에 대한 글을 하나하나 비판적인 눈으로 읽었기에 고백편지의 초안은 마지막에서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다. 정신을 너무 차렸나, 밝아오는 아침 해의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 눕지도 못한 채 의자에서 기절하듯이 잠든 히지카타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좋아하는 트친의 사랑을 도와줘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해지는 게 아닌가,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렇게 힘든거지? 평소에 쓰던 것처럼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를 게 없지만 히지카타는 그 어떤 글보다도 어려움을 느꼈다. 고백편지를 쓰면서 히지카타는 처음으로 딸기우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했다.
동기가 건네준 바카스를 마시다 멈춘 히지카타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지난밤, 상대에 대한 대략적인 특징만으로 고백편지를 쓰기에 부족하다고 느낀 히지카타는 며칠만이라도 좋으니 상대의 최근 행동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최근 행동을 편지에 넣으면 신빙성도 높아지고 더 좋아할지도 모르니까요! 마지막은 거의 변명식으로 주절거렸지만 딸기우유는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히지카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알림 한 개. 딸기우유의 디엠이었다.
[오늘 그 친구가 많이 피곤해 보였어요. 원래도 고양이처럼 까칠한 매력이 있었지만 오늘은 더 심했어요. 걱정이 많이 되어서 피로회복제를 건네주었는데 마시지 않아 조금 서운했고요. 아, 그런데 그렇게 피곤한 얼굴로 담배를 피는데-]
쿵, 히지카타의 머리가 책상을 박았다. 책상 위에 올려 둔 박카스의 병이 살짝 흔들렸다. 몇초간 움직이지 않던 히지카타가 앓는 소리와 함께 발을 굴렸다. 불편하던 마음과 하루종일 고민했던 초안은 완성된 반면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이유를 알려주는 감정이 예고도 없이 훅 들어왔다.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후회스러워서, 질척거리는 질투심과 부러움은 하얗던 히지카타의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책상에 정면으로 이마를 박았던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면서 알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깨달아 잔뜩 일그러진 옆모습이 울먹였다.
“이런거, 알고 싶지 않았는데...”
얼굴도 정체도 모르는 생판 남인 상대를 좋아하게 되었다. 히지카타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외면하고 싶어도 당장 딸기우유의 부탁을 들어 고백편지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백도 전에 차였네. 씁쓸하게 웃으면서 히지카타는 문서 파일을 열어 고백편지를 천천히 써 갔다. 저와 똑같이 마요네즈를 좋아하고 – 마요네즈는 역시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니까, 라는 생각에 하나도 예쁘지 않은 상대인데도 이 부분만큼은 인정했다 – 골초인 상대에게 고백하는 딸기우유를 상상하는 것조차 역겨웠다. 그럼에도 어느새 한가득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자신을 대입했기 때문이었다. 비참하고 꼴불견이었지만 딸기우유의 부탁을 저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상대에게 달콤한 말로 사랑을 수줍게 전달하는건 배알이 꼴려서 못하겠고, 결국 이런 추악한 마음이 자신을 대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너가 언제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그 행복을 내가 주고 싶어.]
뻔한 말을 쓰는 것이지만 딸기우유의 입을 통해 나올 것을 생각하니 세상 그 어떤 멘트보다도 달콤하고 매력적이게 보였다. 투둑, 키보드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지면서 모니터의 글씨가 꼬부랑 지렁이처럼 일그러짐과 동시에 흐려졌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키보드로 고개를 내리자 물통을 기울여서 물이 흘러넘친 것 마냥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후드득 떨어졌다. 모든게 미웠다. 좋아하는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딸기우유의 고백편지를 대필한 것, 끝끝내 제 감정을 알아차린 것, 하필 저에게 고백편지를 부탁한 딸기우유, 딸기우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상대, 그리고 추하게 질투하는 자신도 모두 미웠다. 엉엉 소리내어서 울고 싶지만 고백편지의 내용에 딸기우유가 꼭 넣어달라고 부탁한 내용이 딸기우유에게 고백받을 사람에게 지는 듯한 기분에 마음껏 울지도 못했다.
[너의 눈물이 모두 내 심장에 떨어져 그 무게가 나를 숨막히게 해. 더는 울지 마.]
마지막 문장을 다 쓰고 전체적인 수정을 하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 수정을 하면서 다시 읽어야 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절대로 오지 않을 다정한 말들이 마치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히지카타는 한번은 울었고, 한번은 설레임에 무의식적으로 발가락을 말았고, 한번은 애정이 듬뿍 담긴 문장 한글자 한글자에 힘을 실어 중얼거렸다. 물론 모든 행동 뒤에는 착 가라앉은 감정으로 모든 상황을 부정하면서 무너지지 않게 노력해줬다. 딸기우유의 사랑이 무조건 이루어질 확률은 낮음과 동시에 자신에게 고백이 향하지도 않을 것이며 고백을 하는 상황에도 자신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에도 수십번 딸기우유의 부탁을 거절할 또다른 자아를 막은 결과 도저히 끝이 안날 것 같던 수정이 완료되었고 편지가 완성되었다.
[딸기우유님, 다 썼어요.]
[헉 벌써요? 제가 무리한 부탁한 거 아니시죠?]
[ㅋㅋㅋ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친절이 히지카타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딸기우유의 거듭되는 감사 인사와 당장 내일 고백을 할 것이라는 디엠이 마지막으로 둘의 대화는 끊겼다. 히지카타는 불 꺼진 방 안에서 빛나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보내지 못하는 말을 썼다지웠다 반복했다.
[정말 고백할 거에요? 저 딸기우유님의 편지가 대행이라고 다 밝힐거에요.]
(지움)
[고백하지 마요. 딸기우유님이 저에게 보낸 글이 그 어떤 글보다 더 다정해요.]
(지움)
[저 딸기우유님 좋아해요. 보니까 상대 완전 별로던데, 그냥 저랑 사귀면 안되요?]
(지움)
“진짜 최악이다...”
한숨을 쉰 히지카타는 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넘겼다.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히지카타는 몇주 만에 드디어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예쁜 사랑을 할 딸기우유와 멀리서 지켜보며 후회하는 자신의 꿈을 꿀 것 같아 의자에서 선잠을 잤었다. 애써 딸기우유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감았던 눈이 일순간 번쩍 켜지면서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면서 비상을 외쳤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컴퓨터 앞으로 후다닥 달려간 히지카타의 달달 떨리는 손이 겨우 고백편지의 최종 수정본을 켰다. 화면을 가득 채운 문서의 끝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딸기우유의 고백 상대인 ‘너’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인, 히지카타가 써져 있었다.
[-그래서 나 히지카타에게 고백하고 싶어. 이 편지 읽으면 4시 ##카페로 와서 대답해줘.]
좋아하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시킨 채 완벽하게 썼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서둘러 딸기우유와의 디엠 창을 열어 오타를 말하려는 순간, 히지카타의 손이 멈추었다. 만약 딸기우유님의 고백을 받을 상대가 히지카타에게 라는 단어를 보고 실망해서 고백을 거절하면? ‘히지카타’는 또 누구야! 라면서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상대가 고백을 받아들일 일은 없겠지? 결국 디엠창의 커서만 무한정 깜빡일 뿐, 히지카타는 키보드 위에 올린 손을 단 한순간도 움직이지 못한 채 딸기우유에게 수정사항을 보내지 못했다.
“히지카타,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동기가 걸어오는 말에 죄를 진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히지카타는 여전히 쾡한 얼굴로 동기를 바라봤다. 그대로 밤을 꼴딱 새버린 히지카타는 벌렁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의자를 끌면서 앉는 동기의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메아리로 들렸다. 핸드폰을 켜 디엠창을 확인해 보았지만 여전히 딸기우유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분명 읽어봤을 텐데, 오류를 발견했을 텐데, 왜 말이 없지? 점점 죄스러운 감정에 안절부절 못한 히지카타는 제발 저린 도둑처럼 딸기우유에게 먼저 디엠을 보냈다.
[딸기우유님, 고백편지는 건네셨나요?]
[아니요, 고백하면서 건네게요.]
긴장감에 두근거리던 가슴이 더욱 빠르고 무겁게 박동했다. 왜? 그럴거면 왜 고백편지를 쓴거야? 애초에 확신이 없어서 편지를 쓰는 게 아니었어? 근데 고백과 동시에 편지를 건넨다고? 왜? ...내가 단어 잘못 쓴거를 미리 말하려고? 심장이 순식간에 차분해짐과 동시에 비참해졌다. 결국에는 어젯밤에 차올랐던 작은 기대마저 저버린 셈이었다. 애초에 승부가 되지 않는 게임에 멋대로 기대하고 착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헛된 희망은 완전히 히지카타를 죽였다. 강의가 끝났다는 것도 할말이 있다던 동기가 알려주면서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기는 히지카타를 데리고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금연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히지카타네 학교에서 비흡연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히지카타가 종종 애용하던 장소였다.
“...무슨 일인데.”
“끝까지 들어줘.”
낮게 가라앉은 히지카타의 텐션과 목소리를 내내 걱정하던 동기가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처음에 봤을 때는 술에도 마요네즈를 뿌려먹는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과제가 밀렸는데도 후배들 지도도 착실히 하고 동아리 활동도 빠짐없이 하는 너가 자꾸만 눈에 밟혔어. 활동 범위도 겹치고 자주 보게 되어서 언제나 무리하고 있는 너가 신경이 쓰이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야, 너...”
“좋아하는 마요네즈가 보이면 너가 생각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담배필 때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고 언제나 띄고 있는 미소가 아니라 정말 기쁠 때 나오는 활짝 핀 웃음이 자꾸만 생각나.”
“아니, 이게-”
“모두에게 친절한 너가 싫고 앞머리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고릴라 손목 부러뜨리고 싶고 인기 많은것도 싫어. 너 좋은건 나만 보고 싶은데 동시에 남들이 너 안좋게 보는것도 싫어. 너가 이렇게 대단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거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잠시만, 야 사카타, 잠시만-”
“이거, 내가 너 좋아해서 드는 생각이라는 결론밖에 안나오더라. 너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 있는 위치 주면 안돼?”
“...이거 고백이야?”
응. 고개를 끄덕이는 동기의 붉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제 앞머리와 달리 제멋대로 휘날리는 은발의 곱슬머리를 정돈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다다 말을 마친 동기를 가만히 보던 히지카타가 한숨을 쉬었다. 딸기우유님도 오늘 고백하는데, 얘는 왜 겨우 진정시킨 마음 또 심란하게 고백이야. 원망할 상대가 틀렸다는 걸 알아도 동기를 원망해야지 마음이 편해져 히지카타는 속으로 실컷 원망했다. 미안, 사카타. 내가 이렇게라도 안하면 무너질 것 같거든.
“미안 나 좋아하는 사람이-”
“딸기우유?”
거절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상도 못한 단어가 동기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대로 굳은 히지카타를 씁쓸하게 내려다보면서 뒷머리를 긁은 동기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히지카타에게 건냈다. 딸기우유가 쓸 것이라고 알려준 핑크색 편지봉투 한 가운데 붙여진 딸기우유 모양의 스티커가 뇌를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뒤죽박죽 섞인 생각을 미쳐 정리하지도 못한 히지카타에게 동기가 투덜거리면서 쐐기를 박았다.
“SNS의 딸기우유는 좋으면서 현실의 긴상은 싫은거냐고. 이거 익명의 나에게 진거지? 기분 되게 묘하네.”
“아니, 어떻, 게...”
“마지막에 히지카타라고 썼잖아. ...역시 내 정체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쓴 거구나?”
“너가... 딸기, 우...유...”
“참나, 내가 그동안 며칠간 고백 할 상대의 행동을 써서 보냈잖아. 난 거기서 다 알고 일부러 너 이름 넣은 줄 알고 어젯밤에 한숨도 못잔거 알아?”
“...”
“그리고! 내가 너 설명했잖아. 세상에 마요네즈를 제일 좋아해서 모든 음식에 마요네즈를 넣는 사람은 없거든?”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마치 꿈 같아서, 뭐라도 반응하면 꿈에서 깰 것 같아 히지카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련스럽게 편지지를 구기는 히지카타의 시선은 편지지를 향해 있었지만 글자를 읽지는 않았다. 추악한 마음을 담아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쓴 고백의 화살을 맞는 건 저였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을 정리할 수 없었다. 부끄러움, 행복감, 창피함, 놀라움 등등. 그런 히지카타의 마음을 단 하나로 정리해 준 것은 동기가 양 팔을 벌리면서 만든 품이었다. 활짝 벌린 품에 안기지 못한 히지카타는 그제서야 터진 눈물과 함께 편지를 바닥에 내팽겨치면서 동기를 향해 화풀이했다.
“이, 이 나쁜, 나쁜 새끼야!”
“어, 어? 히지카타?”
“좋았, 좋았냐? 어?”
“울지마... 응? 뭐가 불만인데, 응?”
“내가, 힘들어하고 고백편지 쓰는거, 보면서 좋았냐고 이 개새끼야!”
“아이고, 울지마. 너 우는거 너무너무 예쁜데 내 가슴이 아파.”
“대답이나 해!”
빽 소리지르면서 한손에는 편지지를 주워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제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 안에 안은 동기가 푸흐, 하고 웃으며 편지를 든 손으로 히지카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웃어? 웃어 이게? 품 안에서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는 히지카타의 발버둥이 멈춘 것은 동기의 웃음기 가득한 속삭임 때문이었다.
“나도 어제 알았다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진실을 알기 전에도 후에도, 히지카타 너야.”
“나쁜새끼...”
“그렇다고 나 뻥 차버리면 안된다? 딸기우유가 아니라 사카타 긴토키를 좋아해줘.”
다정한 딸기우유는 사실은 동기 사카타 긴토키였다. 그날 피로회복제를 준 사람도, 담배를 피는 제 옆에 있던 사람도, 여러 가지 안좋은 일이 겹쳐 결국 눈물을 터트렸을 때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사카타 긴토키였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알 수 있었다. 딸기우유가 보란 듯이 드러낸 애정을 받는 사람은 저였다. 이제까지의 삽질이, 질투가 자신에게 하는 웃을 수 없는 꼴사나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창피함에 긴토키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걸 들키기 싫은 히지카타가 웅얼거렸다.
“나 좋다는 건 너였으니까... 나 차면 너 똥구멍에 담배 박아버릴거야...”
벌써부터 거기까지 진도를 뺀 생각을 하다니, 사랑스러운 투정은 히지카타를 꽉 안느라 놓쳐버린 고백편지의 존재를 잊게 만들었다. 나풀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진 고백편지를 뒤늦게 알아차려 긴토키의 엉덩이를 뻥 차면서 당장 찾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히지카타의 얼굴에서는 오랜만의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