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지미츠] for you
2월 8일 헤테로 온리전에 내려던 히지미츠 원고입니다. 사실 구상은 해놓고 탱자탱자 놀다가 펑된 원고지만... 개인적으로 보고싶은 부분이 많아서 그 부분 위주로 써 봤어요. 히지미츠는 첫 글이네요! 재미있게 즐겨주세요~! 은혼 헤테로 아이 맛있어 댓글 남겨 주시고요^^(뭐래
퇴고 없는 글입니다! 어색해도 그러려니 넘어가주시고 다들 히지미츠 한입씩 먹어주기~^^
지방 시골의 한적한 영지를 다스리는 크고 고풍스러운 성에 울리는 펜 소리를 배경 삼아 고용인들이 바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빨간 머리 소녀는 빨래 더미를 한가득 들어 옮기고, 얼굴 가득 주근깨가 박힌 소년이 바닥을 쓸면 두꺼운 안경을 쓴 소년이 물 양동이에 걸레를 적셔 바닥을 윤기가 나게 닦았다.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 규칙적이면서 끊임없는 울림에 맞춰 고용인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그러다 뚝 멈춘 소리에 소녀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세탁물을 한가득 들고 복도 한가운데 선 소녀의 뒤에서 툴툴거리는 소리는 얼굴 가득 박힌 주근깨만큼이나 깐깐하고 예민한 성격을 가진 바닥을 쓸던 소년이었다.
“야, 길 막지 마. 거기 아직 청소 안 했단 말이야, 비켜.”
소녀는 이 성에 고용된 지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자신의 일을 맡던 늙은 노파의 허리가 끝끝내 아작나면서 비어진 세탁 담당 자리를 맡게 된 것이었다. 아주 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대로 이 성을 맡아온 고용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이 성과 관계없는 사람인 소녀가 적응하기에 한 달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성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첫 영주부터 대대로 이 성을 관리한 시종인 집안의 아들이라며 은근 자신을 무시하는 주근깨 소년을 노려본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소년을 무시했다.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열이 받힌 소년은 소녀의 어깨를 쎄게 밀치며 소리 질렀다.
“야!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비키라고!”
“페, 페터, 소리 낮춰. 여기 영주님 서재하고 가까워...”
뒤로 밀린 소녀의 얼굴이 확 구겨지면서 좋지 않은 성격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세 시종인 앞에 있는 고풍스러운 커다란 문이 벌컥 열리면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세 명을 얼어 붙였다. 공기조차 무거워진 상황에서 소녀의 입이 얌전히 닫혔다.
“영주님 서재 앞이다. 조용히.”
검은색 갑옷을 가볍게 걸친 사내의 낮고 엄숙한 말투에 그저 고개만을 끄덕인 시종인들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참고 있던 한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위압감에 눌려 고분해진 소녀는 방금전까지 소리 높여 싸우려던 상대였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질문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나도 모르게 압도당했어.”
“아,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 저분, 영주님 휘하 기사단의 기사님이셔. 부기사단장님? 그렇게 알고 있어.”
큰 키에 새카만 머리카락, 청회색의 서늘한 눈동자는 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까칠하고 절로 움츠려지는 인상은 미간 사이로 잔뜩 잡힌 주름에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굳게 닫힌 입술의 입꼬리는 절대로 올라갈 일이 없어 보였다. 반듯한 자세는 흐트러짐 없는 옷가지처럼 완벽을 추구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미남이시네.”
“그렇지? 우리 영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남이셔. 이 성의 고용인으로 들어오기 되게 치열했지? 다 저 기사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지원이 끊이지가 않데.”
속닥속닥, 방금 전 영주의 서재에서 나와 주의를 주었던 덕분에 세 아이들은 둥그랗게 모여 목소리를 죽이고 속닥였다. 넓고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복도에서 언제나 빈틈을 메우던 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줄인다고 해도 주변의 고요함에 소리는 결코 작다고 하지 못했다.
“그렇다네, 미남씨?”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펜, 멈추셨습니다.”
은은하게 띄우고 있던 미소가 한곳으로 모여지면서 입술을 부루퉁하게 삐죽 내민 채 책상에 내려놓았던 펜을 어쩔 수 없이 들어 올리지만 종이에 쓰다 만 글은 잇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투덜거렸다.
“아아- 하기 싫어. 내키지도 않아...”
“그래도 하셔야죠. 그야 영주님 결혼 청첩장인걸요.”
샐쭉 노려보는 오키타家의 영주, 오키타 미츠바의 한숨이 깊어졌다. 큰 공을 새운 조상님이 작위도 마다하고 지방의 적당한 크기의 영토를 하사받은 덕분에 대대손손 오키타家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빈곤하지도 않는, 그럭저럭 괜찮은 부를 축적하며 살아왔다. 딱히 결혼에 큰 비중을 둘 이유는 없었으나, 아주 오래전 죽은 前영주인 미츠바의 아버지가 죽기 전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체결한 약혼이 석 달 전, 갑작스럽게 상대측으로부터 처음 듣게 되면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약혼을 취소하기에 20년 이상 이어오던 약혼의 파기에 명분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영지를 관리하며 지내오던 오키타家에게는 수도의 꽤나 이름있는 집안을 상대하기에는 벅차고 골치 아플 것이 뻔할 뻔자였다. 미츠바는 갑작스럽게 온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생각하고는 다시 깊은 한숨을 쉬면서 턱을 괴었다.
오래 이어오던 약혼을 결혼으로 성사시키자는 막무가내에 약혼 파기 명분을 찾을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제 지인에게 청첩장을 돌리라며 같이 온 청첩장 시안을 두 시간 넘게 작성하고 있으니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종을 울려 디저트를 부탁할 때도 쉼 없이 펜을 놀리던 미츠바는, 문을 두드리며 코를 찌르는 따끈한 홍차와 에클레어, 타바스코를 같이 들고 온 사람을 보고 놀라 가볍게 종이 위를 움직이던 펜이 강하게 눌려지면서 펜의 잉크가 터져 나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면 시종인 소녀의 발걸음이 멈춘 것도 이때였다.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미츠바의 눈동자가 스리슬쩍 굴러갔다. 집중하라며 따가운 눈총을 주었던 남자의 날카로운 청회색 눈동자의 시선이 닿고 나면, 그 시선이 닿지 않음에도 닿고 있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여운을 남겼다. 얼굴을 올려다보면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에 오밀조밀, 매력적인 눈과 코, 그리고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단정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브이(V)자로 덮고 있다. 이리봐도, 저리봐도, 고개를 기울여봐도, 정면에서 봐도 남자는 미인이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세상 슬프고 아련한 사연은 모두 본인의 것이라는 듯 단정한 외모는 입을 열면 더욱 빛을 발휘한다.
“...다 보셨습니까?”
“응?”
“아까부터 자꾸 뚫어져라 제 얼굴을 쳐다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가만히 보는 것도 아니고 고개도 가만히 두시지 않으시고, 대놓고 보시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습니다.”
“어머, 들켰네?”
그러니까 들킨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입을 벌렸다 지쳐 포기한 듯이 다시 굳게 다무는 히지카타의 삼킨 말을 제멋대로 상상했지만 꽤나 신빙성 있어 보인다고 스스로 감탄한 미츠바는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면서 다시 힐끔, 히지카타의 동태를 살폈다. 히지카타의 곧게 자리한 눈썹만이 미동 없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고 에클레어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함은 에클레어의 본 맛을 아는 미츠바가 상상한 환각이었다. 주방장이 오늘도 자신이 아는 지식, 감각, 유행에 관해 회의감과 의문을 느끼며 만든 미츠바를 위한, 미츠바만의 에클레어는 평범과는 머리가 멀었다. 입에서부터 머리까지, 뇌의 주름까지 전달되는 타바스코의 알싸한 매운맛은 분명 그 어느 진열대에도 전시되지 않을 상품인 것은 분명했다.
입술에 묻은 에클레어의 타바스코가 잔뜩 함유된 다크 초콜릿의 코팅을 살짝 축이고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로 손을 뻗었다. 주방장의 이것만큼은 본연의 맛을 느껴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며 내어준 홍차였다. 딱히 취향은 아니었으나 영약한 주방장은 고용인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복도 한복판에서 혼신의 연기를 하며 미츠바에게 간청해 거절할 수도 없었다. 따끈한 차에 타바스코를 이후에 한두방울 떨어뜨려 넣는 것도 꽤나 만족스러운 맛을 낸다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목이 울렁거리며 반듯한 목의 내부를 따라 아래로 넘겨지는 소리에 히지카타는 괜시리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히지카타는 모든 감각을 미츠바에게 향한 상태였다. 촉각, 시각, 후각, 미각 모두 미츠바와 공유하듯 함께 느끼고 상상하며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피부가 따끔해지고 고개가 절로 돌아갈 것 같은 미츠바의 열렬한 시선을 겨우 참았건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조용한 서재에서 부드러운 에클레어를 베어 물고 입안 가득 퍼지는 타바스코를 느끼다 삼킨 미츠바의 목 울림소리부터 시작해 입술을 다시는 미츠바의 행동을 그 흔한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지만 전부 느끼던 히지카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주방장의 애처로운 애원에도 불구하고 엉망진창 레시피를 건낸 미츠바를 고용인 대부분이 알지만 그녀가 타바스코를 물에도 타 먹을 생각을 할 정도로 선호한다는 것은 그녀의 최측근이자 가족인 동생 오키타 소고와 히지카타 토시로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클레어의 초콜릿은 겉보기와 다르게 타바스코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그녀가 입술 위에 묻은 갈색의 초콜릿 소스 색을 붉은 혀로 핥아 먹을 것이라는 것도 모두 히지카타 혼자만 아는 사실이었다. 오키타도, 주치의도 진절머리를 내는 미츠바의 독특한 타바스코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어른의 사랑을 받을 나이의 어린 소녀가 울고 있었다. 비어있는 손을 홀로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마치 허전한 손을 필사적으로 외면해 눈물을 멈추려는 듯 행동을 반복해 보지만 실제로 비어있는 손이 그런다고 채워지지 않으니, 소녀의 눈물은 그칠 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 뒤로 어른들이 가득 줄 서 있으나 소녀는 등 뒤로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소녀 뒤의 어른들이었다. 하나둘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소리가 모여 작은 웅성거림이 되었다.
점점 목소리가 쉴 정도로 복도 한가운데서 우는 소녀의 등 뒤에서부터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곧 복도에는 소녀의 흐느낌만이 남았다. 나이가 많은 고용인들의 입을 다물게 한 사람은 그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소녀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나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흑, 흐윽, 흡, 킁...”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면서 겨우내 닦는 것이 전부인 소녀에게 그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않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수건을 꺼내 소녀의 앞에 쓱 내밀었다. 눈을 가린 두 손 사이로 불쑥 내밀어진 초록빛의 단정한 손수건에 놀라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소녀가 그제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흐읍, 흡...”
“이제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응...”
“저는 前 오키타家의 영주님의 은혜를 받아 어제부터 정식 기사가 된 히지카타 토시로라고 합니다. 부디-”
미츠바는 딸꾹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갑옷을 가볍게 갖춰 입고 검을 찬 남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없어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말투는 눈물을 뚝 그치게 할 만큼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 차이에 놀라 시선을 맞추니 자신을 히지카타라고 소개한 기사의 청회색 눈동자가 눈앞에서 반짝였다. 때마침 그때 커다란 복도의 창문에서 햇살이 들어왔기에 히지카타의 눈동자가 반짝였겠지만 미츠바는 그 생각보다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눈동자가 내는 빛이라고 생각했다. 한 발자국 앞에서 거리를 두었던 히지카타의 발걸음이 성큼, 미츠바로 향했다. 긴 머리를 한데 모아 묶어 결 좋은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내려진 꼬리가 움직임과 함께 흔들렸다.
“저에게 오키타家의 영주인 당신의 곁을 내어주겠습니까?”
한 손을 내밀면서 입꼬리가 억지로 올라간 서툰 미소는 얼핏 보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미츠바는 떨리는 입꼬리, 손수건의 떨림, 그리고 무엇보다 반대편 손을 자꾸만 바지춤에 훔치고 있는 행동에 긴장이 탁 풀렸다. 어린 미츠바에게 정을 주었던 부모님은 일찍이 미츠바가 철이 들기도 전에 세상을 떴고 태어난지 한달도 채 되지 않는 간난뱅이 동생을 지킬 사람은 저밖에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눌려지는 영주의 책임과 의무로 압박감에 시달리다 오늘 터지고 말았다.
미츠바는 히지카타 역시 비어있는 손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부모님의 얼굴과 추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사는 대부분 귀족의 장남이 아닌 그 밑의 아들들이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따라서 기사들은 대부분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대다수지만 가끔 고아들도 있다고 했다. 실력을 우선시하는 직업인 만큼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의 품에서 떠나 훈련한다는 덤덤한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은, 동질감 때문이었다.
“흑... 흐윽... 흐아아앙!”
“미, 미츠바님? 미츠바님?”
안도의 한숨이 순식간에 소리 없는 아수라장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히지카타의 조심스러움과 예의 바름으로 미츠바를 겨우 안정시켰다 생각했던 고용인들은 미츠바가 커다랗게 울어버리자 하나같이 눈을 부라리면서 히지카타를 노려보았다. 기사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울고 싶은 것은 히지카타였다. 이제 막 기사 서임을 받고 영주를 지키는 일이 영광이요 의무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서임식이 있던 수도에서 지방 영지로 돌아오니 서임식에서 충성을 맹세했던 영주는 죽었고 생전 처음 보는 또래 소녀가 주인이 된 것이었다.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부모의 부고에 영주 서임식은 물론이고 식음을 전폐한다는 소식과 함께 모셔야 할 주인이니 달래보라며 떠밀려 온 것이었다.
뭐가 뭔지 정리가 덜 된 히지카타가 맡게 된 소녀는, 생각보다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이러다 쓰러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자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쇳소리를 내며 우는 소녀에게 서임식에 참석했던 형 타메고로가 건네주었던 손수건을 떠올리고 건넸다. 눈물에 눈이 부어 제 기사도 알아보지 못할 주인은 이쪽에서도 사절이었다.
“미츠바님... 그, 저,”
손수건을 꽉 쥔 채 서럽게 우는 미츠바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기억의 처음도, 지금도 검밖에 모르는 태생 기사인 히지카타가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주인의 앞에서 검술로 묘기를 부릴 수도, 그런 재주도 없었다. 당황한 히지카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츠바가 거부한 그날의 점심을 담은 카트였다. 언제 미츠바가 식욕을 되찾을지 몰라 고용인들이 미츠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음식을 함께 옮겼던 것이었다. 후다닥 카트 앞으로 간 히지카타는 미츠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처음 손에 닿은 물건을 덥썩 잡아 미츠바에게 건네었다.
“우, 울지 마십시오. 이거는 제가 즐겨 먹는 것인데, 이거로 조금은 진정을 하셨으면.... 좋겠... 좋... 네...”
흐끅, 히지카타와 고용인들의 바램대로 미츠바는 눈물을 그쳤다. 어느새 빨개진 눈가와 흰자에 새빨간 핏줄이 도드라진 채 눈물은 여전히 방울방울 달고 있는 물기 어린 눈동자가 깜빡이면서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히지카타가 내민 물건에 눈을 고정한 미츠바가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이거를 좋아한다고?”
“아, 이거, 아니, 네. ...좋아합니다.”
“...타바스코를?”
“...네...”
히지카타는 몸 안에서부터 열기가 확 퍼져 피부 겉에도 붉어졌을거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츠바의 놀란 눈동자가 생긋 휘면서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지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우뚝 서 있는 고용인들의 위세에 살짝 기가 죽어 있지도 않는 맛취향을 미츠바에게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다.
“너무 좋아해서 모든 소스는 타바스코로만 해 먹고, 차에도 타바스코를 탈 정도이니 이제는 물에도 타바스코를 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차, 너무 갔나 싶을 정도에 미츠바의 맑고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방금까지 세상 서럽게 울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이번에는 히지카타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렇게, 맑은 사람이었던가.
“아하하, 그게 뭐야! 이상해, 정말 이상해! 아하하하!”
그치지 않는 미츠바의 웃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던 것은 미츠바가 성큼 다가와 히지카타의 비어있는 손을 덥썩 붙잡으면서부터였다. 이제 두 아이의 손은 비어있지 않았다. 붙잡힌 손에 땀이 나지 않을까, 히지카타는 연신 타바스코통을 잡은 엄지손가락을 문지르면서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햇살이 여전히 내리쬐는 오후의 1층 복도 한복판에서, 히지카타는 눈이 부셔 멀어버릴 것 같은 반짝임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주인은 반짝임 그 자체의 사람이었다.
히지카타가 미츠바를 모시며 훈련을 시작할 때, 미츠바 또한 훈련을 시작했다. 타바스코로 가득 차 매운 향이 알싸한 식탁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매운 향을 참지 못하고 물을 벌컥 들이마시지 않게, 모든 음식에 타바스코를 넣는 습관을 들였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타바스코로 버무려진 스파게티를 입안 가득 채운 채 우물거리는 미츠바는 그날 오후 큰 용기를 내어 타바스코를 넣은 물을 히지카타에게 건네주려 갔다 들은 대화를 생각하며 우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으악, 이게 무슨 향이야!’
‘콘도상, 그거 주세요. 미츠바님께서 주신 거에요.’
‘토시에게? 그치만 토시 너는 타바스코 못먹잖아!’
‘못먹는게 아니죠. 먹을 수는 있죠.’
‘하지만 토시는 마요네즈를 더 좋아하는거, 모두가 다 아는데... 내가 영주님께 슬쩍 알려드릴까?’
‘아뇨, 됐어요. 미츠바님께서 주신건데, 어떻게 거절을 해요.’
‘토시이...’
울먹이는 기사단장 콘도 이사오의 대견스러운 눈물을 무시하며 눈을 찡그린 채 먹는 히지카타의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미츠바는 콧물이 들어 차 훌쩍이고 나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나지는 않았다. 그가 타바스코를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을 달래려고 아무렇게나 말한 것을 알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오히려, 미츠바는 슬펐다. 자신과 히지카타의 위치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가 타바스코를 건네며 달래주던 일이 히지카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이 슬펐던 것이었다.
매운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물을 마시지 않은 미츠바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배를 움켜잡았다. 오전까지 타바스코로 채웠던 배가 아픈 것 같았다. 언젠가 같이 식탁에 앉아 타바스코를 나눠 먹을 생각이 와장창 깨지면서 저녁 시간에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끝끝내 왈칵 쏟아냈다. 억울함과 무지함, 슬픔을 한데 담아 흘려낸 눈물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같이 타바스코를 나눌 일도, 함께 식탁에 앉을 일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미츠바에게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다.
“미츠바님, 왜 결혼하기 싫으신 것입니까?”
차라리 여우짓 하려고 다 알면서도 물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히지카타를 너무 잘 아는 미츠바는 그것이 그저 바램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올곧고 너무할 정도로 바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히 피곤한 일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약혼자와의 결혼 준비에 통 잠을 이루지 못한 미츠바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을 내뱉었다.
“경이 그 상대가 아닌데 결혼을 왜 하죠?”
“...네?”
“뭐, 그렇다고요.”
홍차를 마시면 피곤이 잦아들거라는 말을 한 사람이 고용인들 사이에서도 허세가 심한 로버트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미츠바는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얼버무렸지만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츠바가 보다 높은 신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이 몽실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당황한 히지카타의 얼굴은 홍차보다 더한 상쾌함을 줘 피로가 절로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미츠바는 충분히 머릿속에 히지카타의 흔치 않은 표정을 기억한 미츠바는 만족스럽게 다시 홍차를 집어 들었다. 그 어떤 홍차보다 더욱 맛이 좋다고 생각해 로버트보다 주방장에게 치하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츠바님...”
조금 긴 음미 끝에 찻잔을 내려놓고 책상 위로 일없이 내려가려던 찰나를 움켜잡은 히지카타가 신음하듯이 미츠바의 이름을 내뱉었다. 낮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처음 만났던 때처럼 제 시야로 불쑥 내밀어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내미는 기사의 행동은 그 어떤 행동보다 조심스럽게 허락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고귀하신 손을 잠시 제 손에 빌려달라는 기사의 정중한 예의에 미츠바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히지카타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미츠바의 손이 올려지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살짝 입맞춤을 한 히지카타의 고개가 들려지면서 미츠바를 마주했다. 히지카타가 가진 더 높은 시야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히지카타의 얼굴을 감싸쥐지 않으려고 미츠바는 손을 더듬어 책상 위에 나뒹구는 펜을 다급하게 움켜잡았다.
“주군의 행복을 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주군께서 행복을 얻으시는 걸 곁에서 지키는 것보다 기사로서 그보다 더한 명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히지카타의 말에 미츠바는 펜을 부서뜨릴 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그대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미츠바는 입을 달삭이다 그저 싱긋 웃었다. 기억의 시작을 함께한 최고의 기사이자 믿음직한 충견이자 사랑하는 남자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게 차지하는 기사로서의 삶을 무시할 정도로 미츠바는 매정하지 못했다. 차라리 자신과 히지카타가 독하디 독할 정도로 매정했다면 지금 잡고있는 것이 펜이 아니라 히지카타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은 언제나처럼 미츠바의 가슴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마워요, 경. 이제 나가볼래요? 이 편지만 쓰고 오늘은 좀 쉬고 싶어서요.”
“많이... 부담드린 말이었나요.”
“그럴리가요. 오전부터 몸이 영 무거워서 일찍 쉬고 싶은 것 뿐이에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다정하게 잔인한 말을 남기고 온기조차 남기지 않은 히지카타는 가볍게 서재를 나섰다. 이제는 짧게 잘라 목 뒤가 슬쩍 보이는 흑색 머리카락의 잔상이 닫힌 문 위에서 떠다녔다. 히지카타가 잡았던 손을, 사심 없이 입술이 닿은 손바닥을 한참을 어루만지던 미츠바 또한 망설이다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불필요한 대화 없이 필요한 대화만을 하는 미련할 정도로 성실한 기사에게 닿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님?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아, 네. ...미츠바님께서 목욕에 들어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르네요. 알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욕실로 발걸음을 돌리는 고용인의 뒤를 보며 히지카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면서 서재에서 멀어졌다. 서재를 나오긴 했지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고용인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손을 정중하게 부탁하고, 무릎을 꿇고, 손등에 키스하는 것은 머리와 다른 행동의 결과였다. 머릿속에서는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손을 낚아채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연인에게나 하는 일이었다. 기사라고 아무에게나 손등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 행동은 겨우 기사가 주군에게 흔히 행해지는 의식이었지만 머릿속은 파렴치하게 전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도 히지카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군의 것이나 다름없는 몸을 허락도 없이 주군에게 닫는다는 것을 상상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입맞춤도 사심이 들어갔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랬지...”
그새 바짝 마른 입안에 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스스로 말하고도 스스로 놀란 히지카타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본관에서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기사들의 훈련장은 본관과 정원을 지나 정문에 이르기 바로 직전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 가려던 발걸음이 멈춰진 것은, 무거워진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군을, 미츠바님을-”
“남의 누님 이름을 왜 함부로 부릅니까, 망할 히지카타야.”
“소, 소고!”
“참나, 누님도 참. 도대체 주군의 이름을 찍찍 내뱉는 문란한 기사가 어디가 이쁘다고 그저 내버려 두는 건지.”
“언행이 그게 뭐야! 기사의 언행은-”
“예, 예, 압니다요, 알아요. 항상 바르게, 품위 있게, 가문의 누가 되지 않게, 맞죠?”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냐.”
고개를 설레 내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히지카타의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소고는 보폭을 넓혀 성큼 히지카타와 간격을 좁히고 발걸음을 맞춘 다음 히지카타를 바라보면서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었다. 기사의 품행에 대해 제 입으로 말한 지 채 10초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그런 규율 따윈 없다는 듯 어기는 소고의 뻔뻔한 태도지만 히지카타는 그저 한숨만 푹 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훈련은 다 마치고 오는 거냐?”
“누구씨랑 다르게 땡땡이를 치지 않아서요~ 그래서, 좋았습니까?”
마치 사전에 얘기한 듯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시선이 맞물리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여전히 앞을, 소고는 여전히 히지카타를 노려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을 탁 푸는 것은 소고의 평소와 같은 나른한 말투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누님에게 또 뭔 짓을 했길래 넋이 나가 있냐, 히지카타야.”
“...주군의 호칭을 똑바로 해라.”
“네, 네~ 또 그놈의 재미없는 규율 타령이지. 뭐, 새로운 소식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새로운 소문?”
미츠바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 예를 들면 혼기가 꽉 찼음에도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미츠바는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던가 – 모두 듣는 히지카타의 성격을 아는 소고는 이렇게 밑밥을 깔았다. 예상대로 걸려오는 히지카타에 스물스물 올라오는 짜증과 즐거움을 억누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누님,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요.”
“...”
“어라, 충격입니까? 충격인가보네요. 뭐, 그럴만하죠. 그야 히지카타씨는-”
“그만. 거기까지 해라 오키타 소고, 너는 오키타家의 직계자손이지만 동시에 기사다. 본분을 잊지 않도록.”
떨리는 말투를 눈치챘지만 소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 소고의 침묵을 놓아주겠다는 암묵적 동의로 받아들인 히지카타는 입을 꾹 다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점점 멀어져가는 히지카타를 바라보던 소고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동요를 보려 부러 다 아는 이야기지만 흔들기 딱 좋은 이야기를 꺼냈건만, 오히려 제 행동에 지적을 당했다. 부기사단장으로서도, 사랑하는 누님의 반려자로서도, 소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히지카타가 자리를 꿰차는 것을 반대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기사들이 사용하는 숙소로 돌아온 히지카타는 기사단장 콘도 이사오로부터 일정을 건네받았다. 마지막 편지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미츠바는 상세한 결혼 일정이 장소, 하객 수, 그리고 그날 경비를 설 기사들의 이름까지 모두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성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 각자에게 모두 다른 역할이 적혀있는 안내를 받았다고 하니, 히지카타는 서재 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 것을 까맣게 잊고 미츠바가 일찍 저를 내보낸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 후시미 하가’
별로 좋은 이름은 아니었다. 히지카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난 후로 심심치 않게 들었던 이름이 가져오는 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바람둥이에 손찌검이 나쁜 이 남자는 도대체 선대 영주가 왜 약혼자로 그를 선택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백작이라는 지위가 아까울 정도로 기세가 많이 기운 집안에 거의 처분되듯이 결혼을 진행하는 제 영주가 안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었다. 검 연습 도중 뜸하게 타바스코가 타진 물이 배달되면 반은 마시다 매운맛에 기침하느라 뱉어내는 것이 반 이상인 일상에 미츠바가 들어온 것은. 첫 만남 이후로 정식으로 보는 것은 두 달 만인 어느 여름날, 히지카타는 제 주군의 약혼자가 성을 방문할 것이니 미츠바를 호위하라는 임무를 받고 훈련소에서 벗어나 성으로 갔다. 곱게 차려입은 미츠바는 붉어진 눈가를 살풋 접으면서 해사하게 웃었던 순수함은 온데간데 없고 낯선 표정으로 방 한가운데 꼿꼿하게 서 있었다.
성인들도 버거워하는 영지 일을 막힘 없이 한다는 어린 주군은 첫 만남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완벽한 타인으로 히지카타를 맞이한 미츠바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히지카타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그렇게 기별 없는 약혼자를 기다리면서 미츠바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풀벌레가 울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히지카타를 쳐다본 미츠바의 두 눈에서, 그렇게 찾아볼 수 없었던 순수했던 그 나이때의 앳됨을 보았다. 미안하다는 듯 살풋 웃는 미츠바의 눈가가 서럽게 운 것 마냥 붉어져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훈련에 집중하지 못한 히지카타가 홀리듯 검을 들고 찾아간 곳은 미츠바가 있는 성의 정원이었다. 본래라면 미츠바의 부름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인적이 뜸한 곳을 찾은 히지카타는 더운 여름날에는 상의를 벗고 검을 휘두르면서 간간히 스쳐 지나가는 미츠바를 창문에 비쳐 바라보자 그제서야 집중할 수 있었다.
혼자서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그 바람에 상처를 입어 슬퍼하지는 않은지. 히지카타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은 곧 드러났다. 고용인들과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해사한 미소를 띄운 채 말을 나누어서, 뭐가 그렇게 바쁜지 복도를 한참이나 왔다갔다 해서, 이제 막 걸음을 걷기 시작한 제 어린 동생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걸음마를 도와주어서 히지카타의 발걸음도 끊이지 못했다.
눈에 한 번 담고 나면 눈을 감아도 매 순간순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까 두려웠는지 히지카타는 소고가 훌쩍 자라 기사단에 입단할 때까지 정원에서 훈련을 강행했다. 가끔 마음이 심란할 때, 걱정이 될 때, 히지카타는 20년 가까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 장소로 가서 조용히 미츠바를 눈에 담고 안심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내색이었다.
결혼식에 어울리는 복장과 결혼식에 어울리는 음악, 음식, 그리고 하객들. 미츠바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통보만으로 이뤄지는 일방적인 대화 주도자인 제 약혼자이자 예비 남편인 후시미 하가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흰색 꽃이 수놓아진 장갑으로 주먹을 말아쥔 미츠바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후시미 하가와의 결혼에 초대한 하객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답변해 왔다.
‘후시미家와 엮이는 것은 사양하겠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며, 제 가문과 저를 봐서라도 어떻게든 참석만을 애걸복걸해 모은 하객들이었다. 빠듯한 예산에도 상대측이 원하는 대로 최고급만으로 결혼식을 구성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상대가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연락두절인 것이었다.
“후시미家에 연락은 어떻게 되었지?”
“답변은 왔으나 자신들도 모른다는...”
머리를 짚은 것은 소식을 전달 한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불안불안했던 결혼식이 결국 파국으로 내딛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와 늙은 노집사의 두를 울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미츠바는 다시 한번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후시미 하가의 행방을 더욱 면밀히 조사해 보라고 급하게 명령했다. 집사가 물러가자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신부는 텅 빈 대기실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할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절망감도 들었지만 생각보다 최악의 감정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엉망이 된 것이 아니라 ‘사교 활동’이 엉망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터이니. 미츠바는 이 상황에서도 제 옆에서 꽃 자수가 새겨진 장갑을 낀 손을 잡고 입술을 누르는 상대를 히지카타로 상상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결혼식 준비로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 히지카타에게 받은 손등키스는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잊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사교 활동’이 엉망이 되어도 좋으니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인가?”
“네, 어디서 여자 끼고 술이나 퍼 붓고 있겠죠, 그 한랑. 누님이 그 옆에 있을 생각하면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소고, 그만. 그래도 주군의 결혼식이다. ...다시 한번 후가님께서 자주 다니시는 술집에 들렸다 오도록 해. 머리도 식힐 겸.”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아도 좋은데, 굳이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도엠.”
“도엠?”
“그런게 있습니다~ 그럼 야마자키랑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연회장을 가득 메운 휘황찬란한 장식과 사람들을 보면서 히지카타는 입술을 초조하게 잘근 물었다. 눈이 부시게 밝은 빛을 내는 샹들리에 아래, 한쪽에서는 오케스트라 악단이 결혼식 서막을 장식할 장황한 곡을 두 번째 반복하고 있었고, 고용인들은 쉼 없이 음식과 음료를 나르면서 하객들이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썼다.
하지만 그런 정성에도 하나둘씩 곡이 반복되고, 신랑신부는 보이지 않으며, 고용인들은 자꾸만 음식과 음료를 권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웅성거림과 추측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식은 언제 시작하죠?”
“신랑이... 아무래도 후시미家의... 그 사람 이잖아요?”
“오키타家의 이름을 봐서 참석했건만... 쯧.”
듣고 싶지 않은 주군의 평판이 깎이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히지카타를 괴롭혔다. 문득 혼자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을 미츠바가 이전, 약혼의 관계에도 보란 듯이 바람을 맞은 기억이 겹쳐지면서 정신이 들자 히지카타는 대기실 앞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하면서 들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 어정쩡하게 들린 손을 망설이기 한참, 견디다 못해 안에서 미츠바의 목소리가 히지카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거기서 날을 샐 건가요? 들어와요, 히지카타경.”
“...주군.”
“어머, 제 부군이 될 사람이 벌써 왔나요? 경의 임무는 결혼식의 제 호위,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후시미 후가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그렇군요.”
잠시 침묵이 방을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두운 표정의 미츠바를 멋대로 내려다보면서 해주고 싶은 말을 고르던 히지카타는 정원을 산책하자고 제안하는 미츠바의 말에 후보를 모두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산책, 이요?”
“머리를 좀 식히고,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하객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달해야겠지요. 그 말도 생각하게요.”
“그렇지만 소고가-”
“경,”
단호한 말이 히지카타의 변명조가 다분히 들어있는 말을 뚝 끊어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츠바의 눈동자가 낯설지 않았다. 그 시선이 히지카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한 글자씩 강조하면서 힘있게 말했다.
“저는, 지금 경과 산책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에요.”
아, 내가 누구에게 사로잡혔는지를 잊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약혼자에게 바람을 맞고, 이후 사교계에서 그 일로 영애들에게 은근한 비웃음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미츠바의 당당한 눈동자가 괜한 자존심을 보여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정원에서 복도를 스쳐가는 미츠바의 생기 있는 눈동자에 덜컥 겁에 질려 검을 내팽겨치고 달려가 미츠바에게 말을 걸었다.
‘미츠바님,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그, 들었, 습니다. 지난번 사교계에서 약혼자와의 만남에서, 그-’
‘아하, 그거요.’
너무 가볍게 이야기하는 미츠바에 더 긴장한 것은 저였다. 당한 사람은 미츠바이고, 상처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미츠바였는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미츠바에 도리어 저가 더 발을 동동 굴렸다.
‘괜찮아요. 후시미 후가, 이잖아요.’
‘네?’
‘그 사람에게라면 몇백, 몇천 번이든 바람 맞히고 사교계에서 입에 올려져도 괜찮아요. 다만...’
‘그게 괜찮을 리가 없지 않잖습니까! 어째서 주군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몇 번이고 삼켰지만 미츠바는 재촉하는 것 하나 없이 히지카타를 기다려주었다. 마치 뒷말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듯이. 미츠바의 살짝 부담스러운 시선에 히지카타는 자신의 말을 몇 번이고 되감으면서 점검해야 했다.
‘주군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가요.’
‘걱정, 해주는 건가요?’
‘당연한 말입니다.’
‘후후, 고마워요. 경의 그런 태도만으로도 나는 이미 아무렇지 않음에서 모든 것을 털어내고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어요.’
‘예?’
‘앞으로도 내가 걱정되면... 이렇게 안부라도 물어봐 줄래요?’
살풋 웃는 미소에 저도 따라 웃는 것이,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만드는 미츠바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츠바는 괜찮다고 하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곧 잊고 넘겨버렸다. 그 강인함에, 넘어졌음에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마음에 히지카타는 완벽하게 사로잡힌 것이었다. 언제나 히지카타 마음에 커다랗게 새겨져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을 그제서야 떠올린 자신이 한심했다.
환하게 빛나는 성에서 몰래 둘만이 벗어나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으로 향하자 음악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키타家의 영지가 있는 지방 시골 부슈는 유독 겨울에 추운 지역이었다.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강조하며 어른스러움이 가득하다고 미츠바가 보자마자 웃음을 지은 드레스는 얇았기에 바람을 맞자마자 부르르 몸을 떠는 미츠바에게 히지카타는 서둘러 웃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히지카타의 체향, 히지카타의 온기가 가득 담긴 자켓을 양손에 그려쥐면서 히지카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미츠바가 환하게 웃으며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훈련소에서 검을 휘두르는 히지카타에 흥미가 돋아 검을 한 번 만져보겠다고 떼를 쓰고 명령을 내려도 들은척 만척도 하지 않을 정도로 제 것을 주지 않는 히지카타가 선뜻 내어주는 물건에 미츠바는 차고 넘치는 진심을 이번만은 외면하기로 했다.
“춥네.”
“들어갈까요?”
“아냐. 이게 딱 좋은 것 같아. 머리 식히기.”
“머리 식히기...”
중얼거리는 히지카타를 본 미츠바는 안쓰럽게 웃었다. 이 기사님은 또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선을 넘은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겠지. 그의 골똘한 몰골을 질리도록 본 미츠바는 더는 미련 갖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더 보고 싶을 정도로 좋지만, 그럴수록 더 우울한 생각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던 것이었다. 정원의 어두운 그늘에서 정체 모를 새카만 것이 풀썩, 미츠바와 히지카타 바로 옆으로 쓰러진 것을 눈치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후시미... 후가, 님?”
“으윽, 끅! 어라, 끅, 엥, 하하, 이게 누구, 끅, 야! 소문의 가련, 끅, 한 내 아내 아닌, 끅!”
채 말도 잊지 못할 정도로 얼큰하게 술에 취한 후시미 후가가 정원 한가운데서 엎어진 몸을 휘청이면서 일으켰다. 훅 끼쳐오는 술냄새에 미미하게 찌푸려진 히지카타는 미츠바 앞으로 손을 뻗어 미츠바와 후시미 후가 사이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단 한번도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해본 적 없는 히지카타에게는 낯설고 무례한 행동이었다.
“후시미 후가님. 오키타 미츠바님이십니다. 이제 곧 결혼식이 시작 될 예정이니 술을 깨고,”
“너가 뭔데! 끅, 백작님이신 이 후시, 끅! 후시미 후가님에게 소리야, 어?”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만 성으로-”
“아 비켜봐!”
눈이 풀린 후시미 후가가 히지카타를 옆으로 밀치고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백작 신분의 후시미 후가에게 일개 기사인 히지카타가 명령이나 다름없는 행동에 불복할 수는 없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살짝 상체를 뒤로 빼면서 후시미 후가를 피하려는 미츠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히지카타는 전에 없던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한 손은 이미 검을 반쯤 뽑은 채였다.
“이게 그, 끅, 아내, 끅! 크큭, 크크큭... 히끅! 몸매는 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차피 아내잖, 끅! 소유물을 만진다는 건데 뭐, 끅, 불만이냐?”
“아직 결혼 전이며, 존엄성을 무시하는 발언은-”
“아- 말 많고 반항적인, 끅, 아내는 필요, 끅! 없는데... 끅! 왜 이런, 끅, 여자가, 커헉!”
“경! 히지카타 경!”
비명을 지르듯 미츠바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벽조차 없어 미츠바의 단발마같은 비명은 곧 허공에 사라졌고, 거칠게 숨소리를 내뱉는 히지카타의 한숨이 정적에 흩날렸다. 성은 여전히 밝았고, 현란한 악기 소리는 조금 떨어진 정원에서도 집중한다면 들릴 정도로 웅장했다. 점차 진정되는 숨소리를 갈무리하면서, 히지카타는 떨림이 멎은 검을 공중에 한번 휘두르면서 검에 묻은 피를 흩뿌렸다. 뺄 때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던 검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 다시 들어갔다.
“겨, 경... 지금, 지금...”
“용서를 구합니다, 나의 주군.”
무릎을 또다시 꿇은 히지카타가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미츠바의 손을 찾아내 잡았다. 살짝 거친 자수지만 그만큼 뚫린 구멍이 많아 미츠바의 온기가 장갑 아래로 전해졌다. 히지카타는 황홀하다는 듯이, 성의 화려한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미츠바의 손과 모든 것이, 한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지그시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손등과 입술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그 모든 순간에도 히지카타는 미츠바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명백한 충성과 맹신이 함께 어우려지면서 전에 없던 소유욕이 일렁였다. 그 투명함 속에서 미츠바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 또한, 히지카타를 무조건적으로 믿으면서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네요. 그것도 백작을.”
“...그는 주군을 욕보았습니다.”
“더 이상 기사일 수 없네요, 히지카타 토시로.”
“기사가 아니면...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없나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질문에 질문으로 히지카타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쿡쿡, 작게 웃은 미츠바는 히자카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어깨에 걸친 옷이 들썩이면서 조금 불편한 자세가 되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기사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어쩌면 기사여도 그라면 언젠간 했을 일을 미츠바는 영주와 기사의 관계가 아닌, 오키타 미츠바와 히지카타 토시로의 관계로서 부탁했다. 영주는 아랫사람들에게 부탁해서는 안 된다고 어릴 적 예절 시간에 배운 일을 되새기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부탁이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을 빈틈없이 꽉 껴안으면서 속삭였다.
“당신은 나의 주인, 내 모든 것을 가진 주인인 것은 변함없습니다.”
결혼식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