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가벼운 루프물 한번 써 보았습니다...!ㅎㅎ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한때를 보내고 있던 카구라는 뜬금없는 과거 루프를 겪게 되면서 혼란과 이유를 알 수 없음에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원수로 지낸 2개월, 친구로 지낸 3개월, 입덕 부정기 1개월 하고도 반, 짝사랑 8년을 거쳐 드디어 고백받는 순간, 이보다도 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하루하루 행복의 최대치를 찍고 있는 카구라는 연인에게 매일같이 반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뻔한 클리셰였다. 카구라가 연인과의 전화를 끊고도 다음날 있을 데이트를 위해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 들어간 순정 만화의 주인공이 겪을 만한 바로 그 절차를 뜬눈으로 밤새운 다음날 아침부터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평소에는 차분하게 내린 갈색 앞머리를 잠자리에서만 보았던 매끈한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아름다운 굴곡의 몸선을 땀에 젖은 나체가 아닌 수트에 맞춰 내보인 카구라의 연인은 장롱 속 먼지 쌓인 면허를 꺼내 카구라의 자취방 앞에 주차한 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여기서 ‘그것’이 드러난다면 카구라는 당장이라도 가방 속에 혹시 몰라 챙겨온 비장의 향수를 뿌릴 예정이었다. 코를 박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거친 숨을 내뱉는 연인이 바로 맡을 수 있게 어깨와 쇄골, 그리고 귀 밑에 말이다.
“무슨 준비하는데만 하루가 걸리냐? 이거나 받아.”
“귀엽지 않기는.”
피식 웃으면서 받아드는 ‘그것’, 제 머리색을 꼭 닮은 코랄빛 장미들을 시작으로 리시안셔스, 에드워즈엠버스 등의 색색의 꽃이 진한 향기와 함께 코끝을 간지럽혔다. 마미가 꽃다발을 주는 남자는 최악이라고 했다, 해. 눈썹을 팍 찡그리면서 쯧, 하고 혀를 찬 연인은 진심으로 후회하는 듯 꽃다발을 가로챘고 카구라는 첫 데이트라는 전제였다고 황급히 말을 덧붙이면서 오키타의 옆구리에 살짝 주먹을 밀어넣으면서 다시 꽃다발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모두 생화였는지 꽃잎은 부드러웠고 카구라는 폼은 있는데로 잡아 보지만 실상은 버벅거리는 초보 운전사 연인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한껏 놀리면서 연인이 이끄는 데이트의 첫 목적지로 향했다.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조차 그 흔한 고속방지턱 하나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차의 움직임은 분명 그 어떤 신형차가 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승차감이었다.
첫 데이트 장소는 영화관이었고, 연인이 선택한 영화는 무난한 액션 영화였다. 늦은 점심을 먹으로 레스토랑에서 연인의 집요한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집중해서 스테이크를 썰던 카구라의 칼이 결국 삐끗해 접시를 긁는, 아주 섬뜩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로 잠시 중단되었다.
“너, 아까부터 자꾸만 금발의 쭉쭉빵빵 여자 배우만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해.”
“뭐? 야, 너 내가 한 말을 들은거 맞냐?”
“아~ 아주 자.알. 들었다, 해. 쭉쭉빵빵 금발 미녀가 어떻게 남자의 뺨을 쓸어 내려서 턱을 어루만지다 입 안에 쩍쩍 달라붙는 꿀을 발라놓은 듯한 혀가 남자의 입안에서 휘저었는지, 이 스테이크가 다 썰리기도 전에 아주 생생하다 못해 풀 에이치디로 자동 재생된다, 해!”
“잠시만, 너 설마 내가 진짜로 여자 배우한테 관심 있어서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했다고 생각하는거, 아니...지?”
“하! 그게 아니면 대체 뭐냐, 해! 그 2, 3분 되는 키스씬, 애정씬이 99분의 화려한 액션씬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유가 그게 아니면! 대체 뭐냐, 해!”
“그 저주받은 눈치가 아직도 발전이 안되어 있는거냐.”
“지금 이 상황에서 눈치 이야기가 왜 나오는거냐, 해.”
“그래서 고백도 내가 먼저 했잖아, 안그래?”
“아아, 그래. 눈치가 죽에 말아먹을 눈치라서 고백도 네놈에게 빼앗겼고 대단하다 못해 저 우주까지 명성을 날린 네놈의 그 대단한 영화 리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이거는 내가 먼저 하겠다, 해.”
격식을 차린 레스토랑에서, 둘 내지는 셋, 혹은 넷으로 구성된 연인과 가족이 주 손님인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끊이지 않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모두 끊기고 정적만이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에 카구라의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말소리가 내려앉았다.
“헤어지자, 해. 이별만큼은 눈칫껏 해주겠다, 해.”
누군가가 목 뒤로 음식을 넘기는 소리조차 없는 일방적 통보는 연인을 반사적으로 일어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카구라! 조금은 화난, 그렇지만 진심은 아닌 새된 연인의 목소리에 흔들린 것은 사실이나, 카구라는 너무나도 확실한 상황에서 딴 여자에게 한눈팔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연인을 향한 분노가 너무나도 컸기에 멈추지 않았다. 흥분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몸이 그대로 그려지는 수트를 차려입고 평소에는 몰지도 않는 자동차를 어설프게나 운전해 멋진 장면을 연출시키려는 연인만으로도 충분한데,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와 신호를 주고받더니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아예 주방에서 이리저리 무언가를 지시하는 연인의 모습은 지난밤 지루할 정도로 뻔한 순정 만화를 읽지 않았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프러포즈 직전이었다. 눈치도 더럽게 없는 나도 아는데, 왜 망치냐고, 왜. 왜 하필 잔뜩 기대하게 만들고 뻔한 전개에도 충분히 만족할 리액션도 준비했는데 왜 이걸 망치냐고. 카구라는 울기 싫어 콧물을 괜히 훌쩍였다. 고여있는 눈물이 혹시라도 더 차올라 결국엔 흘러내릴까 텅 빈 채로 말라있는 콧속을 킁킁거렸다.
“아... 아파...”
한참을 걷던 카구라는 낯선 장소에서 멈춰서 퉁퉁 부어오른 발을 내려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물방울이 검정색 구두 위로 하나둘 방울방울 떨어졌다. 여름의 시작에서 손수 무릎을 꿇어가면서 신겨주던 연인의 손이 흐릿한 잔상으로 카구라의 눈물 사이로 비춰졌다. 여름에 가을 구두를 사주는 의도가 뭐냐고 연인의 과한 행동에 쑥스러워하며 핀잔을 주는 제 손등에 입술을 지그시 누르면서 눈을 활짝 휘면서 속삭이는 연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을의 시작에 너를 데리러 오는 나를 맞이해줘. 이 구두를 신은 채로.’
가을의 시작에 카구라를 데리러 온 연인을 맞이한 것도, 연인을 두고 달리고 걸은 것도 모두 이 구두라는 사실에 열이 확 받친 카구라는 순간적으로 구두를 벗었다. 새끼발가락이 퉁퉁 붓고 뒷꿈치가 까져 피가 났지만 오히려 상처를 낸 구두를 벗으면서 카구라는 편안함을 느꼈다. 구두를 한 손에 들고 힘껏 내던졌지만 그럼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한참을 씩씩거리던 카구라는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괜한 화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영영 이대로 끝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구두를 내던졌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당장 코 끝에, 손 끝에 연인이 건넨 꽃다발의 부드러운 꽃잎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연인이 선물한 물건을 제 손으로 버렸다는 사실이 달갑게 받아들이기엔 아직 섣부른 것이었다. 힘없이 몸을 돌린 카구라는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낸 순간, 뒤통수를 가격당해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어야 했다.
“누구냐, 해! 죽고싶, 냐... 해...”
“아? 죽고 싶냐는 말은 내가 할 말이지! 어이 거기 암컷 고릴라, 잘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의 뒤통수를 먼저 갈긴 건 그쪽이라고.”
“...하? 하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사실은 달라진 것이 있으나 사소한 것이니 넘어가자면, 찰랑거리는 잘 빠진 갈색 머리카락이 매끈한 이마를 덮고, 그 앞머리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이 얼마나 웃길지, 카구라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면 위로 질끈 묶어 말 꼬랑지마냥 같이 흔들거리던 긴 머리카락이 아닌 목조차 닿지 않는 짧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씩씩거리는 검은 가쿠란의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다 못해 데이트에서 딴 여자 이야기를 주구장창 늘어놓느라 방금 이별을 통보한 연인, 오키타 소고였다.
“너... 열... 몇... 살...?”
“차이나, 너 신발 집어던지면서 뇌까지 같이 던진거냐? 아니면 내가 던진 네 신발에 맞아서 뇌가 싹 죽은거냐? 자기 나이도 모르면 어쩌란 거야.”
“그, 그래서! 몇 살이냐니까!”
“열여덟.”
맙소사, 카구라는 흐릿하게 바래져서 먼지가 뽀얗게 오른 10년 전의 제 연인을 눈앞에 두고 두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앳된 얼굴의 오키타는 카구라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카구라는 멍하니 그런 오키타를 쳐다보다 서둘러 붙잡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키타뿐이었다. 그리고 오키타를 붙잡는 제 손목을 덮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매에 화들짝 놀라 곧바로 손을 떼었다. 붙잡았다 다시 뗀 카구라의 행동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 오키타를 곁눈질로 포착한 카구라는 이 상황에서도 새로운 정보를 입력했다. 짝사랑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행동은 이때도 있었던 것이었구나.
“귀엽네.”
“역시 구급차를 부르는 것이 좋겠어.”
“아-! 잠깐잠깐, 잠-시만! 지금 이대로는 곤란한데...”
“왜, 교복에 체육복 바지가 사실은 창피한 거였냐?”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해. 나 지금 원피스... 어라?”
“어라는 무슨. 아직도 잠이 덜 깬거냐? 점심 먹을 때 빼고는 내리 잤으면서도.”
어라라라... 카구라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돌리면서 서둘러 시선을 내려 제 몸을 훑었다. 익숙한 세일러 교복에 푸른색 치마 아래 붉은 체육복 바지와 하얀색 양말은 똑같이 10년 전 자신이 학창 시절 매일같이 입던 의상이었다. 옷장을 정리할 때 한번 보고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그 의상이, 어째서 데이트에 입었던 붉은색 치파오 드레스는 온데간데 없고 입혀져 있는지 카구라는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허겁지겁 눈물나게 가벼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카구라는 ‘이거 알면 구시대’라는 글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구식 핸드폰이라는 사실에, 진짜로 10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두 번 절망했다. 내가 읽은 만화는 이런 타임워프물이 아니었다고!
“...이것도 그거냐?”
“뭐가 말이냐, 해...”
“너가 끈질기게 원했던 계획.”
“...계획...?”
“진짜로 병원 안가봐도 되겠냐? 기억 다 잃은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무슨 계획인지나 말해라, 해.”
설마, 설마. 카구라는 어렴풋이 기억날락 말락 하는 10년 전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키타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면 있을지도 모를 신에게 나 싫어하지 라고 소리지르고 싶을 심정이었다. 불안한 카구라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를 오키타는 한참 뒤에야 입을 떼었다.
“같이 하교하고, 같이 영화보고, 같이 저녁을 먹고나면 할 말이 있다고 했어.”
“그게... 끝?”
“그게 다야.”
나 싫어하지. 신神 나 싫어하지. 카구라는 울상이 되어버렸지만 어느새 앞서가는 오키타를 따라 조르르 움직였다. 10년 전, 입덕 부정기를 겨우 벗어난 초짜 짝사랑러 카구라는 대담하게도 마음을 인지하자마자 오키타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붙어다니면서 오키타가 고백 받는 장면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듯 기억에서 싹 지우고 행복회로를 돌리는 카구라는 정말 어렸고 무모했고 또 그렇기에 용감했다.
“지금 배가 고픈걸 보니 우리 밥 먹으러 가는거 맞냐, 해?”
“어쭈 배꼽시계는 안망가진거 보니까 완전히 죽은건 아니네.”
“장난하지 마라, 해! 애초에 안죽었고 멀쩡하다, 해!”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이를 묻고 자기가 한 말도 기억을 못해?”
“그, 그건...”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차게 실패했다. 실패한 경험은 카구라를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신감을 잃은 초짜는 점점 마음을 무디게 만들면서 버텼다. 결국에 시간에 지쳐 마음을 포기했을 때 조금이라도 덜 비참해지게 카구라는 오키타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닳고 닳은 마음이기에 일말의 기대도 않던 끈질긴 해바라기는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해를 향해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오랜 짝사랑의, 다시는 겪기 싫고 겪기에는 이미 애정과 다정을 듬뿍 받아 겪을 수 없는 모든 불행의 시작에 카구라는 타임 워프해버린 것이었다. 왜, 도대체 왜? 당장 다투긴 했지만 카구라는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고 충분히 행복했다. 보통 워프물은 가장 후회할 때, 조금이라도 고칠 수 있는 그 상황에 가는 거 아니야? 그럴 것이라면 데이트 시작할 때, 아니 하다못해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로 돌아가야지 10년 전이 뭐야, 10년 전이!
“다 왔어. 안 들어와?”
“어? 아, 아아... 드, 들어간다, 해.”
잡념에 빠져 언제 도착한 건지도 모르는 레스토랑에 들어간 카구라는 맞은편에 앉은 오키타를 메뉴판을 가림막 삼아 힐끔 훔쳐보고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데구르 굴려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길고 차분한 분위기의 오키타는 질리도록 마주 앉아 보았지만 나이가 어리고 머리가 짧고 아직 철없는 오키타와는 단 한번도 단둘이서 마주 앉은 적조차 없기에 카구라는 마치 소개팅으로 나온 낯선 남자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메뉴판에 한창 집중하던 오키타가 메뉴판을 내려놓고 말을 걸자 카구라는 흠칫 놀라면서 시선을 피했다.
“나는 다 골랐어. ...너는 아직 멀은 것 같네.”
“아, 아하하하... 메뉴가 너무 많은 탓이다, 해...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것조차 눈치를 보던 카구라는 웨이터가 오고 주문을 하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시켰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횡설수설했다. 그 사이로 보이던 오키타의 영문 모를 시선에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너 나한테는 크림새우 파스타가 맛있다고 추천하더니 정작 주문한 건 칠리새우 볶음밥이다?”
“추천은 추천이고... 마음이 바뀐거다, 해!”
“너 오늘 하루종일 노래부른 크림새우 파스타를 안먹겠다고?”
“화장실 다녀오겠다, 해.”
음식을 눈앞에 두고 깨짝깨짝,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던 카구라는 어색한 침묵을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음식을 눈앞에 두고 일어난 자신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오키타의 시선을 화장실로 도망치듯 피한 카구라를 잡은 것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웨이터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웨이터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온 카구라의 귓가에 속삭인 웨이터의 말은 어딘가 들어본 익숙한 멘트였다. 그렇다고 작업 멘트는 아닌데, 다른 생각으로 빠져든 카구라를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뒷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웨이터를 확 밀친 자신을 어이없게 쳐다보는 웨이터를 뒤로 하고 카구라는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늘이 고백일이라면서요?”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처음 보는 상대에게 윙크를 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웨이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쑥 내민 엉성한 꽃다발을 노려보다가 아무 말 없는 웨이터가 무서워 서둘러 화장실 문을 닫고 문에 기대 잠시 생각했다. 꽃다발? 내가 꽃다발을 건네면서 고백한다고? 누구에게? ...사디에게?
천천히 문에서 몸을 떼고 세면대 앞에 선 카구라는 물을 틀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10년 전 고백이 왜 기억이 나지 않는지 카구라는 알 리가 없었다. 기억이 닳고 닳아서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8년 동안 딱 죽지 않을 정도로 했던 미련한 속앓이를 연애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지워버렸는지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꽃다발이 뭐냐, 해... 어울리지도 않게...”
고백에 꽃다발이라면 좀 더 깔끔하고 어울리는 옷을 입고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준비한 멘트를 하면서 건네는 것이 낫지, 암. 적어도 차를 타고 꽃다발을... 건네면...
“야, 차이나. 너 큰거냐? 급한거냐?”
상념에서 벗어나게 한 오키타의 무례한 말소리와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구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몇시간 전의 기억이 이제는 희미해졌다. 카구라는 아득해지는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을 뻔했던 다리를 겨우 진정시켜 바로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은 10년 전인가, 10년 후인가. 카구라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달라지는 제 외관을 혼란스럽게 쳐다보았다. 야! 그렇게 가면 내가 뭐가 되냐!! 이제는 레스토랑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문을 쾅쾅 두드리는 오키타의 소리가 마치 나무 아래 득실거리는 호랑이를 피할 유일한 기회라는 듯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카구라는 덥썩 동아줄을 잡았다.
“차이나? 너 괜... 어이, 어디가.”
“집에 갈거다, 해. 놔라, 해.”
“잠시만, 잠시만 차이나,”
“놔라, 해.”
“카구라!”
불안하고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것은 오키타 뿐이었다. 외관, 행동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어쩌면 마음마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루프한 것이 자신만이 아니길 바라는 희망을 붙들고 카구라는 서둘러 과거의 자신이 벌린 말도 안되는 고백의 장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는지,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 얼핏 본 얼굴은 엉망 그 자체였다. 이런 얼굴,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옆에서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는 오키타를 무시하고 한걸음에 오키타와 앉았던 탁자까지 빠르게 걸어온 카구라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레스토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체했다가는 이곳에 완전히 녹아들어 8년의 지긋지긋한 속앓이를 되풀이하고 따뜻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안기고 싶은 연인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아, 다시 생각해 버렸어. 카구라는 화장실에서 겨우 떠올려 낸 자신의 루프 사실을 떠올리자 억울함과 그리움이 뒤섞이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뜨거운 감정이 울컥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오키타의 시선을 피했다. 망할 사디, 내가 너를 놓치기 싫어서,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거 평생 모르겠지. 오키타를 지나치려고 했지만 양팔이 붙들려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 카구라가 몸을 비틀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거 놔라, 해.”
“그게 중요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나도 좀 알자!”
“무슨 일? 하고 싶은 말 없다, 해.”
“하루종일 내 옆에서 방과 후 잊지 말라고 종알거리더니 정작 하굣길에는 뒤통수를 가격하지 않나 레스토랑에 와서는...”
“사디? 왜 말을 하다 마냐, 해?”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조용해진 레스토랑에 다시 잡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웨이터들의 급하게 손님에게 질문하는 소리와 그에 당황해서 답하는 손님의 소리, 접시를 부자연스럽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제서야 카구라는 부끄럼도 없이 레스토랑 한가운데서 어린 남녀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와 상황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레스토랑의 모두가 흥미롭게 관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의미로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리는 것을 두 손으로 식히기도 전에 오키타의 손에 이끌러 식당을 나서는 카구라는 문득 과거가 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앉아. 앉아서 진정하고... 얘기해봐. 너 오늘 정말 이상했어.”
“흐... 어떡하냐, 해...”
“뭐? 뭐, 뭐야, 왜, 왜그...러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지만 8년의 길고도 긴 짝사랑을 하면서 오키타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을 마다하고 뛰쳐나온다던가, 오키타 앞에서 꼴사납게 훌쩍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과거가 바뀌었다.
당황해서 벤치에 앉은 카구라의 눈높이에 맞춘 오키타를 빤히 쳐다보면서 카구라는 목 아래에서 일렁이는 뜨거운 감정을 지금 내뱉기로 결심했다. 큰 이유는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바래진 10년 전 기억을 더듬다 보니 지금의 고백도 별 이유 없이 그냥, 그냥 하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진행한 어설픈 계획이었다. 밥만 맛있게 먹고 집에 와서야 고백하려던 것을 깨닫고 밤중 절규를 부르짖던 과거가 바뀌었는데 여기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카구라가 내린 결론이었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야, 우는거냐? 어? 울어? 울면 내일 학교가서 너 우는 사진 게시판에 붙여서 전교생이 다 보게 할거니까... 아 울지 말라고!”
“흐... 크흥... 크흐흐흡...”
“너 우는거 맞냐...?”
그냥, 이 원석이, 내가 찾은 오키타 소고라는 이 남자를 다른 여자가 열심히 물고 빨고 굴리고 만지고 어쨌든 이것저것 다 한 다음 제 품에 안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품에 안고 놔주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가슴앓이했던 8년의 시간을 보상받을 것 같아서, 그냥 이런 이유였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카구라의 손가락 사이에서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한 오키타가 짜증을 내면서 손가락을 벌리고 울려고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카구라의 얼굴을 확인했다. 상냥하고 못된 내 남자. 카구라는 오키타의 양 뺨을 찰싹, 찰지게 감싸면서 또박또박 힘을 줘서 말했다.
“사귀자, 해.”
“...뭐?”
“네가 좋다, 해. 사겨, 나랑.”
“잠시... 잠시만, 너 오늘 이러려고 나 부른거야?”
“그래. 흠, 선택권은 없다, 해. 예스냐, 예스냐?”
“...푸핫, 크흡, 크크크큭.... 푸하하하!!!”
미쳤나봐. 카구라는 얼굴을 팍 찌푸리면서 오키타를 밀어내고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와락 안겨오는 넓고 앳된 제 미래 연인의 품에 놀라 굳어버렸다. 평소라면 시도때도 없이 팔을 어깨에 두르고 백허그와 포옹을 일삼아서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 몸은 그래도 10년 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오키타를 앞으로 8년간 짝사랑 할 카구라의 몸이어서 착실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뭐야. 엉망진창 고백이잖아. 내가 본 고백 중 제일 최악이야.”
“하? 나 말고도 어떤 년이랑 하하호호 고백을 주고받은 거냐, 해.”
“푸흡, 너 질투하냐?”
“이거 놔라, 해.”
“그렇게는 안되지.”
더욱 세게 끌어안은 오키타가 내뱉은 한숨에 움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제 한숨에 연인일 오키타가 움찔거리는 것 밖에 보지 못해서... 카구라는 또다시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오키타의 품에 천천히 기댔다. 10년 전의 나였다면 이랬을 것이니까... 10년 전의 나라면... 나라면...
“어쩔 수 없잖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건데.”
“뭐? 너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냐, 해?”
“아... 말하기 부끄러운데... 너가 고백한 그 순간부터.”
“...하?”
방금 고백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번쩍 고개를 들자 눈꼬리를 휘게 접고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저를 비추고 있는 오키타가 가득 찼다. 길게 늘어진 머리가 뺨을 간지럽혔고 가로등이 번쩍이는 밤하늘을 등진 오키타의 말소리는 느리고 낮았다. 언제 현재로 돌아온 것이지, 당황한 카구라가 오키타를 밀어내려고 하자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면서 단단히 가뒀다. 느긋하게 말하는 오키타는 방금까지 자신이 서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휩싸인 카구라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노려보자 코를 맞대었다. 가까웠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면서 코끝을 맴돌던 오키타의 앳된 10년 전 냄새가 진한 향수에 묻혀 사라졌다. 오키타의 거리에 맞춰 발끝을 힘껏 들어올린 카구라의 발에는 가을의 시작에 데리러 온 연인을 맞이하기 위한 신발이 신겨 있었다.
“양보단, 질이지?”
이 향수, 나랑 같이 가서 고른 향수잖아. 향수 싫다면서 질색하던 사디스트 어디갔어. 카구라는 눈을 천천히 감는 오키타에 맞춰 입을 벌려 키스를 하면서 불현듯 든 생각에 잠깐 취했다. 어쩌면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과거를 바꿨기에 오키타가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얘기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어도 오키타는 따라와줬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카구라는 오키타 품 속에 있고 입을 맞추고 있고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 남자,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