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무소요] 하굣길
그는 어딘가 붕 떠 있어 보였다. 실제로도 그가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을 학교 내에서 보지 못했다. 하교하는 어느 날, 지갑에서 떨어져 나간 동전을 따라 들어간 낯선 골목에서 타 학교 교복을 입은 무리들의 중심에 서 있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언제나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따분하게 텅 빈 책상을 노려보던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즐겁다는 아우라를 내뿜는 것은 당연하게도 새로웠다. 타 학교 학생들 중 한 명의 어깨에 발을 올려놓은 모습은 자칫 좋지 않은 한 장면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험악한 분위기를 내뿜는 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오히려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동전을 주우면서 슬쩍 흘겨본 찰나의 순간은 이랬다. 흥미가 생겼지만 더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서둘러 몸을 돌려 빠져나온 골목에서는 더 이상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거기, 넥타이, 조끼, 그리고 명찰 어디있지요?”
그였다. 코랄빛 머리를 땋아 한쪽으로 내린 그는 복장 불량을 한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그를 의식한다는 것을 알리기 싫어 등 뒤로 숨긴 손에서 난 땀이 움켜쥔 치마를 적실 만큼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무시하는 그를 잡아챈 것은 같은 선도부이자 절친, 카구라였다.
“카무이! 소요쨩 말 못들었냐, 해! 복장 불량이다, 해. 운동장 세바퀴 돌고 와라, 해!”
“돌대가리 동생아, 나도 알거든?”
귀찮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이 삽시간에 가까워지면서 숨을 헛들이켰다. 내쉬지도 못하고 단단히 굳은 내 앞에서 명찰을 두어번 흔들더니 카구라가 뒤에서 던진 욕설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화답을 하면서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운동장을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고 나서야 다시 선도부 일을 이어가는 카구라에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벌려진 입에서는 바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노란색의 명찰이, 검은색으로 정갈하게 쓰여진 ‘카무이’라는 이름이 아른거려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는 눈에 확 띄였다. 그렇게 흔한 머리색이 아닐뿐더러 그는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타학교의 일짱이라는, 고등학생이 갖기에는 조금 오글거리고 민망한 이름이었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아 공공연히 아이들은 그를 일짱이라고 불렀다. 날라다니는 먼지가 보이는 햇살이 밝은 오후에는 언제나 잠을 잔다는 것도, 점심은 언제나 부족하다고 카구라의 음식을 호시탐탐 노린다는 것도,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라도 절대로 먼저 입을 먼저 열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그가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그만큼 알려진 정보가 적었다. 추측뿐인 그는 흥미를 유발하는 사람이었다. 좀 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학기 초, 그에게 다가간 사람들은 많았다. 위험하면서도 끌리는 매력에, 쓸데없는 말이 없는 조용함과 고요함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소문이 부풀어질 대로 부풀어진 지금, 소요는 카무이에게 한걸음 다가가기로 마음 먹었다.
“누구, 카무이?”
“응. 카구라쨩이라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바보 오빠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냐, 해. 소요쨩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콰직, 카구라의 손에서 힘없이 우그러진 철제 캔에서 눈을 겨우 뗀 소요는 몸 어딘가에서 식은땀이 주륵 흘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튄 음료수를 체육복 소매로 쓱쓱 닦은 카구라의 불평이 이어졌다.
“으, 응? 뭐...가?”
“얼굴만 반반해서, 다들 이렇게 많이들 물었다, 해. 소요쨩은 얼굴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해.”
“카구라쨩...”
확실히, 카무이의 얼굴은 매력적이었다. 조금만 근육이 바뀌어도 확 접히는 두 눈은 마치 그의 인상이 부드럽고 다가가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소요는 그것이 뒷전이었다. 어째서 혼자 다니는 거죠? 어째서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거죠? 어째서...
“소요쨩, 이제 체육이다, 해. 슬슬 가자, 해.”
“카구라쨩...”
“응?”
“...오늘 너네 집 가도 돼?”
“으응?”
칼을 뽑았으면 휘두르는 것이 당연한 일. 소요는 칼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검도부의 일정을 끝마친 소요는 조용히 짐을 정리했다. 훈련 중간중간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던 부장을 애써 무시하자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악당의 ‘제길, 두고보자!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알아?’라는 말에 검도부원들과 한참을 웃은 작은 해프닝을 떠올리면서 살풋 웃은 소요가 검도부실 문을 열자마자 문 앞에 선 복장불량에 의해 가로막혔다. 목을 뒤로 살짝 꺾어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이 복장불량은 아침에 자신이 지적한 그대로 넥타이와 조끼는 여전히 없었다. 다만, 검은색으로 새겨진 명찰은 착실하게 달고 있었다. 의외라고 할까. 소요는 가만히 끔뻑이면서 카무이 라고 씌여진 검은색 글자를 바라보았다.
“야, 너 알고 있었냐?”
“...무슨 말씀이죠?”
“걔, 아 이렇게 말하면 못알아들으려나? 카구라, 걔가 말했어?”
“무슨...”
“어이 바카무이! 소요쨩한테 막말하지 마라, 해!”
훅 들어온 카구라의 공격을 손쉽게 피하자 표적을 잃고 허공을 가른 카구라의 공격은 그대로 검도부의 단단한 시멘트 벽으로 직행했다. 크아아악!! 고통에 허우적거리면서 발을 감싸고 바닥을 뒹구는 동생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카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서 있는 소요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이 사람, 저번도 그렇고 얼굴을 불쑥불쑥 들이대는 것이 습관이나 보네요. 소요의 못마땅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카무이의 얼굴에 반짝, 미소가 떠올랐다.
“너, 담이 되게 크구나?”
“네?”
“보통 사람이라면 히이익! 흐에엑! 꺄아악! ...이런 효과음은 기본으로 깔고 엉덩방아를 찧거나 아, 나 얼마 전에는 오줌 지린 놈도 봤다니까?”
“소요쨩 앞에서 그런 저급스러운 말 하지 말라 했지!”
“자꾸 이 오빠 머리 때릴거야?”
철없는 오빠의 투정같은 어투로 벽돌로 단단한 바위를 내리치듯 뻑소리가 나도록 똑같이 카구라에게 되돌려준 카무이는 곧이어 지지 않고 반격하는 카구라의 공격을 먼저 져 줄 기색을 보이지 않자, 소요는 한숨을 쉬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해가 질 때까지도 카구라의 집에 가지 못할 것이고, 소요가 나름 세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게 분명했다. 어느새 단정하게 묶여 있던 카구라의 만두머리는 머리 가리개가 겨우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고 카무이는 멀끔한 얼굴에 쌍코피를 터트린 채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씩씩거리면서 화를 못이기는 카구라가 훨씬 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카무이는 이상할 정도로 카구라와의 싸움에서 만족감을 얻는 듯 보였다. 더더욱 눈썹을 한데로 모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숨겨지지 않자, 소요는 카무이에게 등을 돌려 카구라부터 진정시켰다. 카무이는, 확실하지 않지만, 먼저 치지 않는 이상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카구라쨩, 진정 되었어?”
“...응. 미안, 소요쨩.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해...”
“으응, 전혀 아닌걸. 그나저나 오늘 집에 놀러 가는 건 못하겠네. 가서 치료부터 받아.”
“소, 소요쨔아앙~”
“방향 다르니까 가는 길에 싸우지 말고, 응?”
코를 훌쩍이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카구라를 한 번 꼭 안아주면서 조심스럽게 카무이와 또 시비가 붙는 건 아닐지 걱정되어 한마디 해 보았지만 전혀 듣지 않는 듯한 모습에 소요는 아까부터 제 뒤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내는 카무이에게로 살짝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하고, 자신을 볼 줄 몰랐다는 듯한 카무이의 살짝 커진 동공이,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내어주자 보이던 반응과 퍽 비슷해 소요는 그간 카무이가 착실하게 쌓아온 무례함과 선을 넘는 과도한 폭력의 업보를 살짝 미뤄놓고 살풋 미소를 띄우면서 입을 벙긋였다. 싸우지 마세요.
“...라고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응. 말했지. 그래서 안싸우고 있잖아.”
“제가 말한 것은 카구라쨩과 싸우지 말라는 의미였거든요...!”
“그보다 나 이제 너한테 말 걸어도 돼?”
“이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이 그건가요?”
“대답 해줘. 안그럼 싸운다? 너 내가 주먹질 하는거 되게 못마땅해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치?”
아, 정말! 하늘에다 꽥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건 예절에 어긋나니까, 소요는 그저 팍하고 고개를 하늘에 치켜들고 죄없는 하늘만 노려보았다. 카구라는 뱃속에서 공복을 호소하는 울림이 퍼져나오고 나서야 소요를 놔주었고 그대로 종종 집으로 멀어져가는 카구라를 뒤로한 채 집으로 향해 걸음을 옮기자 작게 터져나오는 한숨에 자신이 지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소요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서 욕조에 뜨신 물을 가득 담고 몸을 푹 담그고 이 피곤을 날리고 싶은 생각 뿐이었건만, 걷고 있던 와중에도 몸이 한쪽으로 휘청할 정도로 오른쪽 어깨에 갑작스러운 무게가 실리면서 소요의 완벽했을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천진난만하고 사람을 홀리는 미소로 천연덕스럽게 옆을 차지한 카무이는 실시간으로 굳어지는 소요의 얼굴을 오히려 즐겁다는 듯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나란히 했다.
“방향, 이쪽이 아니지 않으세요?”
“응, 맞아. 우리집은 여기서 반대편인데?”
“그럼 집으로 가세요. 길을 잃어버리셨나요?”
“와, 이렇게 이 악물면서 친절한 말을 해주다니. 너 정말 친절하네. 음~ 그럼 길을 잃었다고 할까?”
“귀여운 척은 저쪽에 가서 하시지요.”
“앗♡ 저쪽이 어디ㄱ... 경찰서잖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제 갈길 가는 냉정한 소요의 거절이었지만 카무이는 그런 것 따윈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경찰서를 그대로 지나쳐 소요의 곁으로 더욱 바싹 붙었다. 카구라네 집을 방문할 생각이라 운전기사에게도 오지 말라고 했기에 소요는 꼼짝없이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애매한 것이, 반절 넘게 걸어온 이 시점에서 버스를 타겠다고 정류장까지 걸어가도 애매하게 세 정거장만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소요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놀리면서 카무이를 상대해야하는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걸음이 빨라졌네?”
“알면 이제 집에 가시죠.”
“에엥? 그럼 너가 나 데려다 줄거야?”
“...아뇨.”
“쌀쌀맞아라. 나는 너한테 관심 많은데.”
“네. 그러시군요.”
“내 관심 되게 비싼거야.”
“자기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러운 내용 아닌가요?”
“응? 아닌데? 이거 신스케가 말한건데... 아, 드디어 멈췄다.”
우뚝 멈춘 소요의 행동에만 환한 미소를 보이는 카무이는 소요의 얼굴에서 질렸다는 얼굴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크게 관심울 두지 않았다. ‘그’ 신스케? 타카스기 신스케? 소요는 입을 뻥긋거리다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다시 입을 딱 다물고 카무이에게 돌렸던 몸을 다시 돌려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경 끄자. 관심 두지 말자. 궁금증과 흥미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듯 다시금 씩씩하게 걸어가지만 소요의 이런 사소한 틈이라도 노렸던 카무이가 따라잡으면서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신스케를 알아? 안좋은 의미지? 신스케를 좋게 보는 사람을 별로 못봤거든~ 일단 선생들이랑 학생회에게 찍혀서...”
“저도 학생회거든요.”
“아, 맞아. 명찰. 너가 나 잡았잖아. 교문에서. 나 그날 운동장 죽어라 돌고 반에 가서 신스케한테 한소리 들은 거 알아? 땀냄새 난다고~”
“정말 운동장을 다 돌으셨어요?”
“응? 돌라면서. 카구라도 그러라 하던데?”
“대충 돌다가 수업 종 치면 들어오시면 되었는데. 다른 애들은 그것도 안돌기 일쑤에요.”
“어쩐지... 신스케가 되게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라.”
“학교 생활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기초적인것도 모르는거죠.”
“너 정말... 예의바른 어투로 신랄하게 말하네.”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 말 거세요.”
“기분 안좋아?”
“...말 걸지 마세요.”
“엑, 왜이렇게 제멋...”
카무이의 말이 끊겼다. 소요의 발걸음도 멈춰졌다. 소요의 집에 다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딱 봐도 위험한 일을 하는 건장한 두 명의 성인이 두 사람을 막고 서 있었다.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용 문신을 한 남자가 턱으로 옆을 가리켰다. 골목을 꽉 채운 남자들의 무리가 슬금슬금 나누어지더니 벽 한쪽을 내주었다. 친절하게 들어가라는 길을 내주다니, 소요는 거기까지 보고 카무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얼굴과 팔, 다리 등 붕대를 칭칭 감아 성한 곳 하나 없어보이는 무리가 낄낄거리고 있었고 그들은 어제, 카무이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던 타학교 학생들이었다. 이런 수많은 조폭들을 고용하려면 꽤나 돈이 심심치 않게 깨질텐데, 소요는 머릿속으로 계산기 두드리기를 완료하고도 여전히 남일처럼 멀뚱히 서 있는 카무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해요? 가요.
소요의 눈짓은 혼자 가라는 것이었다. 덥썩 손목을 붙들려 같이 조폭들이 우글거리는 골목으로 들어가자는 동료의 결연이 아니었다. 주눅드는 기색 없이 당당히 비워진 자리에 서자 입구를 꾸물거리면서 몸통으로 막는 남자들을 보면서 소요는 울컥 짜증을 내버렸다,
“왜 날 끌고 온거에요!”
“같이 가자고 말했잖아.”
“아니 그걸 진짜로 그렇게 해석했다고요?”
“아니어도 같이 가줄거였잖아?”
“웃지마요. 아니거든요?”
카무이에게 붙잡힌 손목을 팍 내리치고 골목을 나가려는 소요의 앞을 막고 있던 덩치들이 다시 몸을 움직여 움직임을 봉쇄했다. 소요의 고운 얼굴에 인상이 팍 일어나면서 우연이겠지 하는 마음에 다시 옆으로 몸을 움직이자 이번에는 아예 손을 뻗어 소요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부딪히는 느낌과 어이없음에 소요는 덩치들 틈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타학교 학생들에게 말했다.
“저기요, 저는 아무 상관 없거든요? 보내주세요.”
“사, 상꽌이 없긴 뭐가 없어! 너, 너 그때도 저놈이랑 같이 있었잖아! 그, 그리고 지금도!”
“하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기분 나쁜 착각 그만하시라고요. 아무. 사이. 아니라고요.”
“거, 거짓말! 어, 어띃게 믿어!”
“하아아....”
“집에 빨리 가고 싶어?”
“말 걸지 말라고 했죠. ...네.”
“금방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내가 해줄 수 있는데.”
그리고 다시 하늘을 노려보는 소요로 돌아온다.
“안돼요.”
“뭐어? 그렇게 나랑 같이 있고 싶어?”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주세요.”
“오, 그 말 되게 멋지다. 다음에 아부토한테 써먹어야지.”
“제가 해결합니다.”
거짓말처럼 카무이의 입이 딱 다불어지고 근처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고 있던 덩치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피식피식 터지는 그때, 소요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 정확히 카무이와 덩치들 사이에서 곧 있으면 납작 엎드려 얻어 맞고 있을 카무이에게 발길질 한 번 날릴 생각에 히죽이던 타학교 학생 중 하나와 덩치 한 명의 머릿속에서 각자 다른 생각이 떠올랐지만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소요의 부활동이 검도부였다는 것을 떠올린 카무이와, 소요를 전국 검도대회 여자 부문 우승자의 얼굴을 떠올린 타학교 학생과, 소요가 내려놓은 가방이 어떤 가방인지 알아차린 덩치를 비웃듯, 소요는 가방에서 죽도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뒤늦게 같은 편에게 경고를 하는 덩치의 머리 위부터 죽도가 내리꽂아지면서 카무이는 난생처음, 소요의 검도 실력을 1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귀한 특권을 얻게 되었다.
“있잖아, 나 알고싶은게 있어.”
“후우... 이 시체들을요?”
“얘네, 안죽었잖아? 고인모독이야~”
“말걸지 말아줄래요. 아니, 그냥 당신도 처리해버리면 이 일을 묻어둘 수 있지 않을련지...”
“뭘 중얼거리는거야? 너 이름 알고 싶어.”
“...예?”
소요는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카무이와 눈을 마주했다. 그래도 이전까지 소요는 무표정, 혹은 잠깐의 흔들림만 보였을 뿐, 명백한 혐오와 질린다는 표정을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소요를 알게 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카무이는 목을 길게 빼면서 소요의 일그러진 표정을 하나하나 분해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도 불쾌감에 포함되었는지 목검을 점검하던 소요는 아예 몸을 뒤로 빼서 검도집 안에 넣었다. 대놓고 피하는 소요였지만 카무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분명 오늘 하루종일 제 여동생에게서 자신의 이름을 수없이 들었을 터인데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아니, 아예 들었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이 무신경의 끝을 보여주는 남자에게 완전히 질린 소요는 실날같이 남아있던 흥미도 떼어내기 위해 파리를 쫒듯, 손을 휘저었다. 말할수록, 아니 상대할수록 피곤해지고 없던 정도 떨어지게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요는 복잡하게 어지러진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일 없어요.”
“아~ 너 기분 상했구나, 그치?”
“당연한!... 후우... 먼저 갈게요.”
“어어, 잠깐만. 난 너에게 흥미가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간다고?”
난 당신에게서 방금 흥미를 다 떨군 참인데요. 소요의 또다시 깊게 내쉬어지는 한숨에도 방글방글 웃으며 후다닥 옆으로 다가온 카무이의 어깨는 텅 비어 있었다. 가방과 검도가방까지 착실하게 챙긴 소요는 눈을 깜빡이며 학생으로서, 선도부로서 마지막 관용을 배풀어주기로 했다.
“가방은요?”
“그게 궁금한거야? 내가 관심있다는 말을 듣고도?”
“찾아줄게요. 이름 써 놨나요?”
“요즘 초등학생도 이름 안적어놔. 근데 너, 내 이름 알아?”
“...카무이, 잖아요.”
“어, 난 너 모르는데.”
“...”
“...아하.”
옆에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듯한 카구라와 닮은 맑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모든 걸 다 알았다는 듯한 웃음기 가득한 말소리에 소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무이의 말에서 두고 온 물건은 없다는, 즉 가지고 온 물건조차 없었다는 의미를 뒤늦게야 알아차린 소요는 이미 카무이를 등지고 쓰러져 신음하고 가끔씩 꿈틀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밀려와, 이대로 가만히 있는 저에게 질려 먼저 가버리길 빌며 소요는 숨까지 짧게 참고 있었다.
“헉,”
“드디어 눈 떴네.”
눈을 뜨자, 그곳에는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활짝 접은 채 소요의 앞에서 키를 낮춘 채 시선을 맞춘 카무이의 눈이 천천히 떠지면서 소요의 숨이 천천히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이 피부로 느껴지고, 자신의 감정이 귓가에 왱왱 멤돌고, 카무이의 말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소요는 뒤로 나빠질 뻔한 것을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었다.
“내 이름이 뭐라고?”
“카, 카무이...”
“좋아.”
다시 시간은 정상적으로 째깍째깍 흐르고, 요동치던 감정은 강가의 수면처럼 잔잔해지고, 카무이의 입은 다시 굳게 닫히면서 소요는 파란 하늘이 아닌 붉게 물든 노을을 눈에 담았다. 천천히 일어나면서 자신을 지나치는 카무이와 마주했던 시간은 짧았을 터인데 그새 긴장을 했는지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찡글인 소요는 비틀거리면서 겨우 후들거리는 다리를 반쯤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저기!”
“어어, 안돼, 아직은.”
“...?”
“다음엔 너가 물어봐야지. 내 이름이 무엇이냐고.”
“...허어...”
“난,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거든.”
그새 간파당한 것인가. 카무이가 골목을 돌아 소요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수많은 단련된 성인 남성들을 상대했을 때도, 전략적으로 열세에 몰렸을 결승 경기에서도 카구라는 언제나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 손 하나 닿지도 않은 상대의 뒷모습을 주저앉아 바라보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흥미로워졌다.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처음 가졌던 흥미라는 감정을 결국은 떨치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는 것이 고까웠지만 이것 또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과연 자신의 이름을 부를 카무이를 마주한다면 가지는 감정은 무엇일까. 검도를 하면서 한발자국씩 성장하는 그때의 성취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검도부에 영입하려는 처음 의도와 많이 어긋난 결말이었지만 소요는 이것 또한 나쁘지 않다,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