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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1. 너는 나를 슬프게 해
지금이 몇월이지.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 눈을 힘겹게 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모두들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굴러서라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하고 있다. 과연 발전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무기력해지는 기분에 인상을 잔뜩 찌뿌려지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런 기분은 어렸을때부터 항상 느끼던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좀 나아지는 듯 했거니만, 아니었나보다. 자꾸만 비참해지는 기분으로 드는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났다. 이 기억이 들어있는 벤치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
꿈은 히어로. 현재진행형이며 이 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정말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다 던지고 빌런으로 진로를 변경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건 배고픔을 못이기고 내 살이라도 뜯어 먹을까? 하는 심리다. 내가 히어로를 지망하지 않을리가 없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그렇지만 정말 간절해서, 정말 빌런으로 의외의 모습에 너가 나를 걱정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마이트, 죄송해요. 토도로키군이 고백을 받았다.
훔쳐보려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보고 싶지 않았다. 짝사랑 상대가 고백받는 장면은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다. 이 가슴아픈 짝사랑을 끝내는 방법으로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상대가 고백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고백을 하는 것. 물론 후자는 절대 못한다. 관계를 끊고 싶지 않고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뭐하나 잘하는 것 없는 내가 너와 동등해지려면 히어로가 되는 것 밖에 없는것, 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도 의외로 굳혀져서 변하질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잊지 않는다. 너가 정말 좋아서 어쩔수 없어도 내 꿈은 내 의지라는 것. 그러니까, 너는 내 꿈을 이루는 것에 좋은 영향밖에 끼치질 못한다. 고백받는 장면을 보면 어느 순간 고백하는 사람에게 나를 대입한다. 많은 고백을 받는 너. 언제나 거절한다. 그 거절상대 목록에 나도 있을 것 같아 무섭고, 두렵다. 점심시간, 소화도 시킬 겸 생각도 좀 할 겸 생각에 몰두한 채 걷고 있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느낌에 어리둥절한 채 정신을 차려보니 벽에 부딪혔다. 이런 곳도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구석진 곳이었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코너에서 너와 처음보는, 아니 서포트과의 한 여학생과 있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너는 잘생기고, 성격은 그닥 좋지는 않지만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저 서툰 것 뿐이라고, 나는 안다. 그런 너는 종종 고백받곤 했는데, 그것은 마당발인 아시다상의 큰소리로 알 수 있었다. 토도로키! 너 오늘 D반의 누구 찼다면서! 걔 엄청 이쁘던데! 역시 이케맨은 여유롭다는 건가~! 너는 그때 뭐라고 답했지? 아무 대답 없었나? 아시다상의 입에서 너의 이름이 나오는 건 대부분 그런 이야기이기에 재대로 듣질 않은게 이제서야 후회된다. 나도 시끌벅쩍한 반아이들에 끼여서 은근슬쩍 너의 취향에 물어볼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왜 그랬을까. 하지만 다음에도 심장소리가 신경쓰여 그러지 못할 것을 안다.
너가 좋아! 나와 사귀어주면 안될까? 너의 고백 상대는 학년과 반을 초월했다. 처음보는 3학년의 선배도 너에게 고백했고, 바로 옆반의 B반의 여학생도 쭈뼛거리며 고백했다. 아시다상의 목소리가 조금 더 작았으면 좋았을텐데. 슬프지만 너를 좋아해서 너에 대한것에는 많은 것을 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정보도. 벽에 기대어 신발코에 시선을 가득 담아두지만 온 신경은 너의 목소리에 집중되었다. 목소리가 청량하다. 어쩌면 정말 그림같은 한 쌍일지도. 너는 고백을 받아들이지도.
미안. 짧은 대답과 너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고백한 아이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우는탓에 움직이지도 못했다. 신발코는 내 머릿속처럼 새하얗고 움직이지 않는 몸과는 반대로 눈물은 제멋대로 후드득 떨어졌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고백하는 당시에 계속 울음을 참고 있었나보다. 어떠한 변명도 붙이지 않고 간결하게 할 말만 전하는 대답이 너답다. 누가 뭐라해도 너의 대답이었다. 너무 다행이고 너무 슬퍼서 코너 뒤에서 우는 소리에 뭍어 나도 울었다. 고백, 받아주지 않아서 고마워. 내 고백도 지금 대답과 같을 것이니? 눈이 아파 한동안은 눈을 뜨지 못할때까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