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카구] 네가 말한 원 이루어지리라
망한 사랑에 관한 단편입니다.
bgm - Destiny(나의 지구) - 오마이걸 ver.
누군가에게 칭송받고, 누군가에게 비난받고, 또 누군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말할 것인가? 자신의 소원? 욕망? 아니면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전체주의적 희망? 무엇이든 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신이 사랑하는 이 남자는 그 어떤 선택지도 고르지 않았다.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을 당장 일어나게 해줘.”
그저, 제 눈앞에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며 가벼운 행동과 언행을 하는 신의 존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는 희열감과 본래 가지고 있는 사디스틱 성격이 서로 뒤엉켜 단 한 번밖에 건낼 수 없는 말을 아끼고 아껴 지금, 이 상황에서 말이 나온 것이다. 충동적이지도 않았다. 신이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눈빛으로 나긋하게 과거에 대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얼마 전이었던 어린 고등학생의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부글부글 끓으며 분노했던, 그때 이미 신에게 말을 건다면 이 말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신의 눈빛의 다정함을 알았기에 지금 그는 무거웠던 입을 열고 단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망하는 신의 모습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한동안 수다스러웠던 입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벌려지고 다시 닫혔을 때는 겨우 감정을 추스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신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원하던 남자의 눈 맞춤이었지만 신은 처음으로 스스로 시선을 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자가 스스로 눈을 맞추자 신은 스스로 시선을 피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남자는 신을 자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럴 때 마다 신은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즐기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올라갔다. 남자는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자신에게 다가온 낯선 여자의 말에 당황하자 여자는 눈꼬리를 휘게 웃으면서 웃고 있었다 라고 답했다. 정말, 즐겁지는 않았다. 노골적인 외면이 즐거울 리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남자의 웃음에 끌려 여자가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나지막히 생각했다. 망할 신 같으니라고.
“어이, 신.”
“...”
“다 듣는 거 알아. 아니, 들리지 않나?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있지만 너는 내 평생 단 한마디의 말만을 들을 수 있으니까. 그 한마디를 어제 썼으니... 들리지 않으려나? 아무튼...”
“...”
“만족해?”
신은 대답이 없었다. 평생을 오키타만 보던 신은 여전히 곁에 불투명도 100으로 있지만 고개를 돌린 채 말을 걸지 않았다.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만으로도 혼자 대답을 상상하며 조잘조잘 말을 끊이지 않았던 신의 침묵에 남자는 머쓱함에 입을 다물었다. 불만에 가득 찬 남자의 속마음은 그대로 삼켜졌다. 남자의 침묵은 대답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는 꽤나 힘들다 라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의미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남자와 여자의 연애, 그 사이에서 싹트는 결혼이라는 진지한 고민, 대화, 싸움, 상견례, 그리고 약혼식. 약혼식은 남자가 제안했다. 거창한 약혼식은 아니고 호텔에서 진지하고 또 가벼운 여러 의미의 대화를 하자는 뜻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천생연분답게 별다른 거부감 없이 가볍게 남자의 제안을 수락했고, 남자가 생각하는 약혼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한 쌍이었다. 이대로 약혼식 날 호텔에서 여자를 품에 안고 자신의 계획을 말하면 여자는 품 안에서 행복하게 웃는 것이다. 남자는 신이 비웃었던 센스를 비롯한 모든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남자의 안목을 비웃어주었다. 상상만으로도 완벽한 계획인데, 실재는 얼마나 더 완벽할까.
남자는 호텔까지 신이 따라올지 의문이 들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이성의 겉모습을 한 신의 존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던 혼란의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까지 신은 단 한 순간도 남자의 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여자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여자의 뺨을 쓰다듬고, 눈을 맞추고, 입을 맞대는 남자의 눈은 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신이 그 자리에서 떠날 때까지, 사실 그 상황은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남자는 신이 또다시 절망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모두 눈에 담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는 약혼식 전날 밤 연인과 보낼 다음날이 아닌 신이 무너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너도 같다, 해.”
“일반화 하지 말라고.”
“후회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겠지. 그리고 슬퍼할 틈새도 없이 어딘가에 떨어진 너의 흔적을 찾아 떠날 것이다, 해.”
“내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떠날거라는 의미야?”
“너는 항상 그랬다, 해. 내가 주는 모든 애정을 받아줄 것처럼 여지를 남기고 실재로도 받아주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나를 포기했다, 해. 그리고 이유도 웃기다, 해.”
우는 것처럼 신의 목소리는 떨렸다. 고개도 숙이고 있어 남자는 신이 완전히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닿는 부분부터 투명하게 비춰지면서 잡히지 않는 신. 원망하는 신의 말을 남자는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너야말로 나를 좋아하는 척,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나만을 원한다는 척 했잖아. 왜 나만 원망해야 해?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날린 나의 업보인 거야?
“너를 사랑하니까.”
젠장, 젠장, 젠장! 분노가 또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남자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신을 등졌다. 휴대폰을 들어 여자의 연락처에 들어간 남자의 손가락이 문득 멈췄다. 신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런 절절하고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나지막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신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이상하게 신이 말하는 말을 흘려듣지 못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있던 그의 특징이었다. 심장이 멈추고,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든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신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면 절대 무시하지 못하는 신의 목소리가 남자를 흔든다. 태양이 지구를 돌아도 절대 변하지 않을 법칙이다.
“원망스럽다, 해. 사랑하는 너가 원망스럽다, 해.”
눈을 찌푸린 남자는 신을 향해 몸을 다시 돌렸다.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해진 상태였다. 평소라면 자신을 향한 당연한 듯한 폭언에는 폭언으로 받아쳤을 터인데, 남자는 종이에 베인 듯 받아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고 말았다.
“너와 내 만남을 원망스럽다고 말하다니, 나를 사랑하는 거 맞냐고.”
“하지만 어쩌겠냐, 해. 네가 말하는 원은 이루어져야 하니까."
미련한 신 같으니라고, 몸을 돌려 신을 등진 남자가 움직여도 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마주했다면 남자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절주절 닿지 않을 말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여전히 남자를 외면하는 신을 뒤로하고, 남자는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신은 따라오지 않았다. 인생을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신을 기만한 죄로 지금이 인생의 반이라고 한다면 남자는 짧은 생에서 처음으로 신이 없는 하루를 꼬박 보냈다. 옆에서 깊은 잠에 빠진 여자의 손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 얼굴, 목, 쇄골, 가슴, 배까지 내려간 남자는 배 위에 귀를 댔다. 오르락 내리락, 규칙적인 움직임에 눈을 감자 신의 생사 여부에 의문을 가졌던 어렸던 한때가 순간 떠올랐다. 벽에 등을 대고 즐거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신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봤지만 그대로 통과해 벽에 귀를 대야만 했던 날 어린 남자는 신의 행복한 웃음을 실컷 들었다. 이제 그 웃음은 퀘퀘묵은 기억 속에서나 꺼내야 했다.
다시 돌아가도 일말의 기대조차 비웃듯 신은 여전히 거리를 두었다. 당장이라도 신을 돌아보게 할 수 있지만 남자는 예정대로 가기로 했다. 그저 지쳤다. 신이 주는 사랑에 의문이 들었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삼키는 즉시 뱉어낼 것 같은 더부룩함에 남자 또한 신을 외면했다. 자꾸만 눈이 가지는 것은 조금만 집중하면 참을 수 있었다.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면 시간을 확인하고 날짜를 확인하는 일을 몇 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비 신부와 드레스를 고르고, 식장을 고르고,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이제 혼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익숙해졌다. 요 며칠 익숙해진 감각으로 신을 의식하지 않은 남자에게, 또다시 법칙이 발동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불가항력이다.
“내가 잘 하고 있는거냐, 해?"
"무슨 말이야."
"너는 전혀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해. 어째서? 너가 말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해."
드디어 마주한 신은 남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외면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에 잠시 빠진 남자는 자신이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이 퍼뜩 들어 뭐라 말을 하려고 했는데, 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런거, 내가 아는 오키타 소고가 아니다, 해.”
“당연하지... 나는 오키타 소고이지만 신, 당신이 사랑하는 오키타 소고가 아니기 때문이지.”
지친다는 표정으로 남자, 오키타 소고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듣지도 못하는 상대를 향해 화를 내고 울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수없이 말했던 그 말을 포기했다. 수년동안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말을 포기하자 똑같이 포기할 것 같은 마음은 이상하게 포기되지 못했다. 말을 붙잡고 있는 동안 마음을 잃을까 전전긍긍했는데, 그 불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상황에 오키타는 헛웃음을 쳤다. 끝까지 기만하는구나, 끝까지.
“가.”
“...어라?”
“가라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사라지라고!”
“...사디? 어?”
“아, 그래. 사라지는 건 내가 해드려야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 난 너를-”
누군가에게 칭송받고, 누군가에게 비난받고, 또 누군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만이 신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칭송의 내용도, 비난의 내용도, 두려움의 이유도 희미해진 신은 마지막 남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남자의 마지막 말이 닿지 않았기에 신은 그럭저럭 결과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원 없이 사랑을 주고 행복하고 싶다는 신의 작은 이기심 또한 멈춰졌다. 신은 잠깐의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만난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환생을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 없었던 남자는 신이 사랑한 사람과 가장 유사했다. 그렇게 수다스러웠던 것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모두 사랑한 사람을 남자에게 투영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마지막에 미소를 지었다. 멋대로 말을 걸어 법칙을 깨버리고 멋대로 나를 밀쳐낸 그의 마지막 말은 ‘원망하고 있어’ 일까? 신은 여전히 따라잡을 수 없는, 단 한 번도 연인이 된 적이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눈을 감아 다시 돌아올 아침을 기다렸다. 아침 해를 등지고 자신을 깨우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