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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는 나를 불안하게 해
너를 보았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너가 뒤를 돌아보면 좋겠지만 눈은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긴장되고 몸이 뻣뻣해지지만 좋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게 사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 확신이 흔들린다. 외줄타기의 곡예사마냥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고 무섭다. 떨어지기가 두렵다.
멍하니 점심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팔았더니 입안 가득 소바를 넣고 우물거리며 나를 툭툭 친다. 안먹어? 배 고프다고 했잖아? 라는 눈빛으로 지그시 쳐다본다. 가끔 말로 표현하는 것 보다 눈으로 표현하는 게 더 빠르고 쉬울 때가 있다. 어쩌다 보니 반 친구가 이 이야기를 듣곤 너만 그런데? 그걸 어떡해 알아? 라는 의문을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좀 더 강했다면, 좀 더 완고했다면 하지도 않을 생각을 마구마구 해버린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면? 너의 과거를 알기에 라이벌이기에 같이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라면? 너가 입안의 소바를 다 비우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 너무 배고파서 잠깐 정신을 놨나봐! 아하하하, 얼른 먹어야지! 합창을 하고, 코로 들어가는지 지금 씹고 있는것이 밥인지 돈까스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역할을 수용하기만 했다. 이러다 체할 것 같아 불안하다.
확신이 없다는것은 보기보다 무섭다. 어제의 믿음이 깨지는 것이다. 수업을 들으러 이동할때, 어느순간 제일 뒤에서 홀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로 두걸음 앞에 너가 걸어간다. 마찬가지로 혼자서. 이 차오르는 감정에 자신이 없어진다. 무개성이어도, 꿈을 향해서는 망설임이 적었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둥실 떠올라 있었다. 사랑이라는 두리뭉술한 개념에도 너에 관해서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밖에 내리질 못한다. 이런 내가 많이 낯설다.
잠시 웹서핑을 하다 어느 순간 익명의 사랑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어렸을때부터 감정이 풍부했고 그것을 잘 표출했다. 그러다 어영부영 오게된 학교에서 운명을 느낀 상대를 만났고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중간과정이 모두 생략된 이 글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개성을 제외하고 질투를 느낄 수 있다는 내가 새로웠다. 그렇지만 썩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북마크한 그 글을 수십번을 읽어 달달 외울 지경이 되었다. 자꾸만 비교하게 된다. 내가 글쓴이라면, 내가 저런 행동을 한다면, 너와 나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는것일까?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좌절감과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을 억지로 마주보면서 까매진 액정을 허탈감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미도리야, 어디 아파? 열이 있는 것 같아. 같은 반 친구에게 이 말을 들었을때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 수면부족, 그리고 점점 올라가는 훈련의 강도로 정신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글을 읽고 나서부터 또렷해지는 정신과 바람한점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감정그래프로 컨디션은 최고였다. 주위를 둘러볼 시간이 없으면 그 일에, 나에 엄청나게 깊이 집중한다. 컨디션 최고로 있을때, 나는 틈만 나면 나와 너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말, 너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너만을 바라보았고 관계를 자꾸 시뮬레이션을 했다. 시뮬레이션이 끝나든 끝나지 않든, 즐거웠든 괴로웠든, 악몽을 꿨다. 온갖 썸이란 썸은 다 탄 너가 결국엔 익명과 사랑을 나누는 꿈. 보건실의 익숙한 푹신함을 느끼면서 지금까지 컨디션 최고가 아닌 나를 몰아붙였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너무 불안해서, 지금의 내가 너무 믿을 수 없어서 결국 찾은 도피처가 너를 원망하고 너를 나쁜 천하의 개새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역시 이건 사랑일 리가 없어.
감정을 사물화한다면 롤러코스터라고 단정지을 것이다. 내렬갈때의 그 짜릿함과 정상의 경치를 바라보는 짜릿함은 엄연히 다르지만 같다고 느낀다. 정상의 짜릿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하강의 짜릿함을 느껴봤다. 아마도 비슷한 느낌이겠지.
아, 정신이 들었나.
세상에. 지금의 난 동굴에서 갓 빠져나와 눈부신 푸른 하늘을 보는 최초의 인간인걸까?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보건실의 평범한 LED 전구 아래에서도 너는 반짝반짝 빛났다. 세간에서 뜨고 있는 조각미남의 스타가 별이라면 너는 은하수다. 세상 모든 반짝거림을 한곳에 모아서 빛나는 거대한 존재. 눈은 껌뻑껌뻑 뜨고 있는데 아무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으니 아직도 아픈걸로 착각한 너가 손을 들어 이마에 댄다. 이상하네, 열은 다 떨어진것 같은데. 한번 한쪽으로 머리를 갸웃거리면 은하의 별이 우수수 유성우처럼 떨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중학교때 학급 아이들이 난리를 치던 스타를 좋아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얼굴이 벌게졌다. 아직도 아픈가봐.
행동은 서툴지만 따뜻하다. 조금은 투박하지만 부드럽다. 보건실의 침대보다 부드러운 몽실몽실한 구름처럼 기분 좋은 너의 손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너는 그대로 하교할때까지 나와 함께였다. 중간에 가도 된다고 말해도 극구 나와 함께 있어줬다. 감정을 사물화 하는건 여전히 롤러코스터다. 다만 난 올라가는 짜릿함을 맛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금 난 정상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고 있다. 이 짜릿함은 그 어떤 짜릿함과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았다.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 너의 대한 확신. 너에 대한 감정의 확신. 너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큰 영향을 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 이대로 지낼 순 없어 난 필사적으로 너에 대한 확신을 찾았다. 그리고 그 확신은 생각보다 빨리 나에게로 안겨왔다. 내가 쓰러지고 몇일 뒤, 히어로 실습 수업때 너와 반 친구와의 개성 충돌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너는 무사했지만 방어를 못한 친구는 보건실로 직행해 리커버리걸의 치료를 받았다. 다같이 영상을 복습하던 중, 우리는 딱히 개생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 너가 개성을 써 상대방도 반격으로 개성을 사용해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반 친구를 보건실로 데려다 주고 반으로 돌아온 너는 모두의 등에 떠밀려 다시 보건실로 향했다. 문득, 나때도 너가 그렇게 가서 억지로 앉아있었던건 아니었는지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올라가던 롤러코스터는 나도 모르게 정상에 도달했었나보다. 이렇게 생각했건만,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너는 잠시 깨어난 반 친구에게 사과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리커버리걸의 환자의 절대 안정에 나왔다고 말을 했다. 그래도, 라는 말에 이제 됐지 않았나. 라고 딱 잘라 버리는 너의 말에 롤러코스터는 드디어 하이라이트인 360도 회전을 했다. 필사적으로 찾은 확신은 진실의 여부에 상관없이 큰 만족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