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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는 나를 새롭게해
약간의 휴식시간에 출출함을 느껴 1층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모두의 틈 속에 홀로 빛나는 너를 보았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든 너만을 쫓고 있다. 이러다 큰 사고 치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게 너라서 행복하다. 같은반 친구들은 물론이고, 다른 반 친구들마저 모여서 웅성거리는 그것, 바로 1주일간의 휴식시간이었다.
빌런의 침입, 놓칠 수 없는 긴장의 끈, 히어로의 압박감 등등. 들판을 뛰어다니는 염소처럼 아무 생각 없어도 충분히 괜찮은 나이에 벌써부터 너무 어른이 된 아이들의 걱정과 간간히 들어오는 학부모의 항의 전화까지 - 히어로가 대단한건 충분히 알지만 이번년도는 더 심한 것 아니냐 - 휴식에 관한 회의가 한참동안 열렸었다. 그리고 주어진 결론. 합숙같은 단체활동은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니 각자 개인활동으로 자기 방어를 높이는 반면 일주일간 유에이 학원 학생이라는 짐을 잠시 내려놓고 평범한 16살이 되라는 일종의 '단기 여름방학'이었다.
이것 때문이구나. 게시판을 가득 채운 구구절절의 휴식시간에 관한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다들 당연하다는 듯, 괜찮은 척 했지만 스트레스도 피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기숙사에 남을 학생들은 남아도 된다는 끝맺침을 읽으면서 엄마에게 집에 못간다고 문자를 드려야지, 라는 생각을 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각자의 스케쥴을 물어보면서 약속을 잡는 이 혼란 속에서 목소리가 아닌 손가락은 닿은 자리가 화끈거렸다. 개성이 열이기 때문일까 무슨 이유인지 화끈거림이 손가락이 닿은 부위에서부터 뇌까지 확산되어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 빛나는 너가 빛으로 나를 두드린다. 눈이, 멀 것 같다.
1주일간, 다른 사람이랑, 약속한 것, 있어? 여전히 소란스러운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대각선 뒤에 서 있는 너가 입을 뻐끔거리면서 물어본다. 사랑에 빠지면 콩깍지가 낀다고들 한다. 이것을 콩깍지라고 부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의 사소한 배려가 너의 서툰면을 완전히 덮고도 충분한 매력이라는 것이 좋다. 그 배려가 나에게만 해당되지 않는것이 뼈저리게 아프지만. 천천히, 입도 작은 너가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서 내가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한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손을 올린다는 것은 어색할 것 같아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이 기쁨을 그대로 얼굴에 담은 채 고개를 흔든다. 아니, 없어, 토도로키, 군은? 다가오는 여름의 열기와 잔뜩 모여있는 이 학생수에서 나오는 후덥지근함에 머리가 핑핑 돌것 같고 약간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지만 너의 곁에서 너와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에어컨이 빵빵한 내 방 침대 위에서 수박을 크게 한입 베어먹는 착각이 든다. 너의 개성이 나한테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게시판 주위의 아이들이 좀처럼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가자는 사인으로 엄지를 뒤로 흔들면서 너의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체육대뢰 이전에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너의 미소를 가득 머금고는 내 손을 잡고 인파를 헤쳐 나간다. 너는 왼쪽은 열, 오른쪽은 냉을 사용한다. 오른손을 잡고 있음에도 뜨거운 손난로를 한여름에 꼭 쥐고있는 것처럼 땀이 금방 고였고 훅 들어오는 열기에 너의 손을 놓칠 것 같아 더욱 세게 잡는다. 내가 세게 잡을수록 걱정 말라는 듯이 부드럽게 잡아오는 너의 또다른 배려에 무의식적으로 꽤나 익숙해진 개성을 사용할 뻔 했다. 세밀한 얼음 조종을 하는 손이 궁금했었다. 손가락은 길었고 얉았으며 내 손과 크게 차이가 있지 않았다. 같은 오른손인데 너덜너덜하고 상처투성이인 오른손을 괜시리 너의 것과 비교해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너는, 손도 예쁘고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구나. 누군가 아주 부드러운 깃털로 기분 좋게 간지럽히지만 그것에 활짝 웃는 것이 연기인 기분이다.
인파를 빠져나와 조금 떨어지고 아무도 없는 로비의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감싸쥐었던 손이 풀려가고 갈곳을 잃은 왼손은 그대로 툭 떨어졌다. 그럼- 이상하게 평소라면 지금 이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두뇌와 집중력이 풀 가동되어야하는데 아까 들뜬 마음과 그것을 유지하거나 상승시키기에 너무 부적합한 상황이 섞여 행복한 자격지심으로 생각이 이탈해 버렸다. 아, 이젠 어쩔 수 없다. 너무 좋아하는 너지만 일단은 라이벌이다. 친구로써 그래도 너보다 나은 나 자신을 어떡해든 찾고만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초조해진다. 한편으로는 개선을 하자! 라는 혁명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혁명은 좀이따 하고 지금은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 라는 기회주의자가 대립하고 있어 점점 뇌 용량에 무리가 온다.
그리고 여기서 카우터 펀치. 시야 가득 들어온 너에 대립하는 한쪽도, 힘들어하는 한쪽도 모두 정지하고 너의 얼굴에만 집중한다. 아, 정말 나는 너의 얼굴이 정말 좋은 가 보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하나둘씩 너로 덮여진다. 불러도 대답을 안하길래. 어디 아픈거야? 손등으로 정신없이 구불거리는 곱슬 머리 아래에 파뭍힌 이마에 살짝 놓은 다음 자신의 이마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아직도 너로 덮여지는 중이라 자동적으로 벌게지는 얼굴색 말고는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안그래도 조용한 주변이 간간히 들려오는 게시판쪽의 소란조차 아예 사라진다. 이 세상에는 소파에 앉아있는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미에 손등을 데고 있는 너밖에 없다. 점점 뒤의 배경이 아름다운 광활한 우주로 체워지려는 참에 너가 나를 살짝 흔든다. 괜찮아?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신경쓰이는 것 있어? 지금 이건 나라도 반 친구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정말 순수하게 걱정되는 순수 100%의 선의. 그것이 자꾸만 이것이 사랑의 행복이다! 라며 웃는 얼굴로 진심이 있는 방의 문을 부순다. 너의 얼굴이 그려진 나무망치를 들고.
내가 생각했던 것을 너에게 말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마음속의 말을 내뱉는 것은 원래 아무렇지 않았지만, 상대가 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사실 너와 약속을 잡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그,그것 가,같으, 니,까. 오늘따라 자꾸만 이탈하는 생각의 자유분방함을 통제하지 못하자 또다시 얼굴이 새빨개진다. 오늘만해도 이 화끈거림을 겪는것이 몇번째인지, 이제는 반쯤 체념하고 반쯤은 너가 우연히 이 사실을 곱씹기를 기대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든 너의 손과 내 손은 비교하는 생각으로 빠졌고 그래서 축 쳐진 것 같다, 뒤로 가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말하기 싫어 얼버부렸다.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어, 입과 얼굴이 같은 말을 하면서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간 너가 말한다. 내 손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자신도 나의 개성과 전략, 그리고 협동심에 종종 열등감을 느낀다는 너의 충격적인 말. 사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질투를 하나씩은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 더 충격을 받았다. 너가? 나를? ...왜?
내가 너를 질투하는건 문득문득 느끼는 것이고 모두들 너를 좋아하고 그만큼 부러워하기에 질투를 받는 너는 쉽게 상상되지만 누구가를 질투하는 너라니. 쉽게 그려지지 않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놀랐을 뿐이지만, 말이 없자 점점 심각해지는 너의 얼굴에 서둘러 아무말이나 했다. 그, 그보다 휴일동안 뭐하냐고 물어봤잖아? 정말로 아무 일정 없으니까, 음, 그게, 너만 괜찮다면 나랑 가, 같이 보낼래? 말이 자꾸 꼬여진다. 그다지 표정 변화가 없는 너의 얼굴에서 새로운 표정이 피어났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이 표정은 나밖에 모른다. ...미도리야가 좋다면. 새빨개진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웅얼거린다. 새로운 얼굴, 새로운 느낌, 그리고 새로운 사실. 모든 게 너로 채워지는 새로운 하루다.